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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인물탐구 <16> 반역의 죄로 엮어라

문화대혁명이 초기 증명된 사실이 있다. 단 한가지 죄명 앞에서는 그 누구도 무사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바로 '반역죄'였다.

 

 

누구든 사소한 꼬투리라도 잡아 '반역죄'로 엮이면 바로 대중 앞에서 죄를 고하고 몰락했다. 문화혁명 초기 중국 공산당 권력의 2인자였던 류샤오치(刘少奇)가 그랬고, 덩샤오핑(邓小平)이 그랬다. 반역죄의 이름으로 엮을 수만 있으면 실제 그 죄가 크고 적은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반역죄는 장칭(江青) 등 문화혁명 주도 세력의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됐다. 죄로 엮기만 하면 수많은 홍위병들이 몰려가 자신들의 방법으로 응징을 했다. 거리를 개처럼 끌고 다니며 온갖 욕설을 했고 소위 '인민재판'을 했다. 굴욕을 견디지 못한 적지 않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반역죄가 왜 그리 무서운가? 2023년 오늘의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신중국 건국 이전 국공 내전 시기였다. 이 시기 국민당은 공산당을 탄압하고 회유했다. 적지 않은 간부들이 한차례 정도는 잡힌 경력이 있고, 이 난국을 벗어나기 위해 가짜 투항을 하기도 했다. 국민당은 주요 공산당 간부들 명의로 신문에 가짜 전향서를 발표하곤 했다. 공산당 내부의 갈등을 유발하기 위한 고도의 심리전이었다. 

 

어쨌든 반역은 국민당이나 공산당 모두에게 최악의 결과를 가져오는 가장 무서운 적이었다. 분명한 적은 상대하는 방법을 찾으면 되지만, 내부에 숨어 있는 반역자는 당을 병들게 하고 결국 죽게 만드는 최악의 '바이러스'였다. 눈앞의 칼은 막을 수 있지만, 등 뒤에서 날아오는 화살은 피하기 어려운 법이다. 공산당은 언제나 촉각을 곤두세우고 내부 반역자를 방지해왔다. 작은 의심이라도 있으면 조직에서 제거했다. 

 

장칭은 이 '반역죄'를 전가의 보도처럼 이용했다. 각종 역사 자료를 정적 제거에 적극 활용했다. 효과는 컸다. 한번 엮인 인물들은 속수무책으로 몰락했다.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 당대 주요 간부들이 하나둘씩 몰락했다. 그 가운데 보이보(薄一波) 등이 몰락한 '61인 반역자 사건'은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다. 류샤오치 역시 연루가 돼 있었다.

 

 

사건은 1936년 차오강쯔(草岗子)감옥에서 시작된다. 당시 감옥에는 보이보 등 공산당 주요 간부들이 국민당에 붙잡혀 감옥에 갇혔다. 일부는 형기를 다 살았지만 풀려나지 못했다. 국민당이 풀어주는 조건으로 '전향서' 작성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은 중국 북방지역 공산당의 핵심 간부들이었다. 이들이 붙잡히면서 북방지역의 공산당 조직은 그 기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럴 때 마침 이 지역에 류샤오치가 새로 지하 공산당 조직을 재건하기 위해 부임을 한다. 류샤오치는 대단히 실질적인 사람이었다. 그가 상황을 보니 간단히 거짓 투항을 하면 되는 것이었다. 풀려나서 공산 혁명에 기여하면 더 좋지 않으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큰 우려가 있었다. 이 일을 당 중앙이 모르게 했다가는 자칫 훗날 해당 간부들이 정말 오해를 받을 수 있었다. 공산당 내부 반역자들과 이들에 대한 당의 처분을 지켜봐온 류샤오치가 이런 우려를 모를 리 없었다. 류샤오치는 그래서 당 중앙에 이 같은 계획을 보고해 허락을 얻는다. 결과적으로 당시 보이보 등 간부들이 석방될 수 있었고, 이들은 류샤오치 생각 그대로 공산 혁명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이때 중국 베이징의 신문에는 보이보 등의 탈당 선언문이 광고로 게재가 된다. 

 

그 뒤 세월이 흘러 모두가 그 일을 잊었을 무렵, 1966년 8월 다시 꺼내 든 인물이 바로 장칭 등 문혁 사인방이다. 그들은 이 사건을 실제 변절이었다고 몰아붙인다. 그 논리는 "그래도 변절은 변절이었다"라는 것이다.

 

1966년 9월 16일 마오쩌둥(毛泽东)에게 보낸 캉성(康生)의 편지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저는 오랫동안 안쯔원(安子文), 보이보 등에게 자수하고 출옥하게 한 류샤오치의 결정을 그래도 되는 것인가 생각해왔습니다. 제가 1936년 8~9월의 베이징 신문들을 살펴봤습니다. 그들이 쓴 '반공 알림'을 통해 보면, 류샤오치의 결정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반공 알림'은 분명히 반공을 하겠다는 결심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보이보 등은 결국 다시 실각을 한다. 실제 그들이 쓴 '반공 알림' 문장이 마오쩌둥을 자극한 것이다. 그 뒤 공산당을 위해서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지를 봐야 정당한 조사였겠지만, 광란의 시대 문혁에서는 캉성의 문제제기가 타당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장칭 등이 노린 것은 류샤오치, 덩샤오핑, 보이보 등의 간부들만이 아니었다. 가장 눈엣가시가 바로 저우언라이(周恩来)였다. 장칭 등이 보기에 저우언라이는 사사건건 문혁을 반대하는 인물이었다. '절충주의' '기회주의' 등으로 욕을 해도 저우언라이는 교활하게 모든 함정을 피해 갔다. 

 

이렇게 고민이 깊어갈 무렵 상하이에서 온 한 보고서가 장칭을 기쁘게 한다. 바로 과거 국공내전 시절 주요 언론사의 하나인 슨바오(申报)에 실린 우하오(伍豪) 선생의 전향서 광고였다. 우하오는 국공내전 시기 저우언라이의 별칭이었다. 그런 그가 공산당 탈당서를 작성했다는 것이다. 이미 그것이 전략적 선택이든 그렇지 않든 본인이 전향서를 썼다는 사실만으로 61명의 새로운 반역자들을 만든 게 장칭 일당이었다. 드디어 저우언라이를 무너뜨릴 최적의 무기를 장칭이 손에 넣은 것이다. 과연 저우언라이는 어떻게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을까?

 


장칭, "저우언라이는 변절자다!

 

"저우언라이는 변절자다!" 장칭이 외쳤다. '변절'이라는 독화살을 날린 것이다. 류샤오치도, 덩샤오핑도 보이보도 모두 이 화살을 맞고 하늘에서 떨어졌다. 저우언라이는 과연 어떻게 했을까?

 

 

장칭의 공격은 1967년 5월 17일 시작됐다. 앞서 상하이 조반파 홍위병은 옛 도서관 자료에서 묘한 광고를 한 통 발견한다. 우하오 선생의 '반공 알림'이었다. 조사를 해보니 우하오 선생은 당시 저우언라이의 별칭이었다. 당시 이미 보이보 등이 연루된 '61인 반역자 사건'이 발생한 뒤였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당이 허락한 변절서를 너무 열심(?)히 써 정말 변절한 듯 보였다는 게 죄명이었다. 그 변절서를 쓰고 반평생을 당을 위해 헌신한 당 간부 61명이 줄줄이 낙마했다.


그런데 이번엔 저우언라이의 변절 알림이 발견된 것이다. 장칭이 보기에 보이보 등의 변절서처럼 내용도 좋았다. 누가 봐도 변절한 것이었다. '이제 저우언라이도 끝이다.' 곧바로 장칭은 3통의 편지를 쓴다. 한 통은 저우언라이, 한 통은 캉성, 나머지 한 통은 린뱌오(林彪)에게 가는 것이었다. "상하이 조반파 홍위병이 '반공 전향 알림'을 다시 발견했습니다. 이 알림의 수뇌는 바로 우하오 선생, 저우언라이 총리입니다. 면담을 요청합니다."


저우언라이에겐 정말 충격이었다. 저우언라이는 당장 모든 일을 놓고 대응책 마련에 나섰다. 여기서 중국 공산당 출판사가 출간한 '중난하이 런우춘추(中南海人物春秋)'에 나오는 묘사가 재미있다. 책에 따르면 "저우언라이가 생각했다. 만약 그마저 낙마를 하면 그것은 그 개인의 일만이 아니었다. 당과 국가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그는 현재의 정황 속에 다른 사람이 대신하지 못하는 책임과 사명을 느끼고 있었다."


사태는 심각했지만, 저우언라이는 정면돌파하기로 마음을 먹는다. 저우언라이가 이렇게 마음먹은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장칭이 캉성에게 편지를 쓴 것과도 비슷한 이유다. 이 사건이 중국 공산당 중앙에서 문제가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소위 연안 정풍 때도 문제가 됐었다. 연안 정풍은 1943년 중국 공산당의 연안 시절 불었던 우파 숙청 작업을 말한다. 

이 사건을 가장 잘 아는 이가 바로 캉성이었다. 캉성은 당대 우하오, 즉 저우언라이와 함께 지하 공산당 운동을 펼쳤고 연안 정풍 때도 같이 조사에 참여했다. 그런 캉성에게 장칭이 편지를 쓴 것은 우하오 사건의 진위를 잘 아는 그에게 자신을 뒷받침해달라 부탁하는 의미도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이런 상황 속에 최후의 수단을 쓴다. 마오쩌둥에게 직접 해명하는 편지를 쓴 것이다. 장칭의 편지를 받은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주석, 연일 쓰촨과 네이멍구 일로 바빴습니다. 그런데 장칭 동지가 우하오 사건과 관련 편지를 보내왔더군요. 우하오 사건에 대해 다시 한번 분명히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우하오 사건은 1932년 2월 18일 신원바오(新闻报)에 나온 위조 알림을 말합니다. 같은 날 상하이 임시 중앙 쪽에서 슨바오에 연락을 취했습니다. 그 결과, 슨바오는 20일과 21일에는 위조된 알림을 내보내고 22일에는 슨바오 광고부에서 우하오 선생 앞으로 또 다른 알림 광고를 거절하는 고지를 게재했습니다. 
당시 위조 알림에 대해 공개적으로 부인하고자 했지만, 결국 이 정도 수준의 대응이 그치고 말았습니다. 슨바오를 통해 공개 부인하고자 했지만 그 결과가 불명확했습니다. 이상과 같은 내용은 지난 16일 오후 이미 주석께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당시 기억을 잘못한 게 있습니다. 우하오의 위조 전향 알림이 살인범 저우언라이와 자오룽(赵荣) 공개 수배 직전에 있었다고 했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1931년 이후 신문 자료를 점검해보니 우하오 전향 알림은 위에 언급한 게 전부였습니다. 홍위병 역시 다른 우하오 전향 알림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우하오 전향 알림은 모두 제가 장시(江西) 이후에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든 것을 정확히 알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5월 19일 밤 저우언라이" 편지 중에 언급된 자오룽이 바로 캉성이었다. 


저우언라이의 이 같은 정면 돌파 방법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마오쩌둥이 역시 과거 사건에서 크게 달라지지 않은 일을 가지고 다시 문제 삼을 수도 없었다. 장칭은 이후 홍위병 학생의 투서를 통해 다시 한번 문제를 제기하지만, 마오쩌둥은 더욱 단호하게 "이 사건이 이미 모든 게 명백히 밝혀진 것"이라고 저우언라이의 손을 들어줬다. 결국 이렇게 저우언라이는 장칭의 가장 치명적인 독수를 피해 간다. 물론 그렇다고 장칭이 순순히 물러난 것은 아니었다.

 

 

1968년초 장칭이 좌지우지했던 상하이 혁명위원회가 발표한 '반도를 잡아라' 통보에는 '우하오 전향 알림 사건'이 포함돼 있었다. 5월에는 상하이 홍위병이 상하이 일대에서 수집한 저우언라이 관련 자료를 밀봉해 비밀리에 장칭에게 전하기도 했다. 정말 황당한 것은 7월 상하이와 저장성 일대를 돌아다니며 저우언라이 관련 자료를 수집하던 이들이 지역 주민 신고로 붙잡힌 사건이다. 훗날 이 사건은 역시 장칭이 지시해 벌어진 일로 판명난다.


장칭의 이렇게 집요한 공격은 '우하오 전향 알림' 사건뿐이 아니었다. 별의별 트집을 다 잡았고, 결과적으로 저우언라이는 잡지 못했지만, 그의 주변 인물들을 하나둘씩 낙마시키는 데 성공한다. 누구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누구는 이름을 버리고 문화혁명 기간에 숨어 살아야 했다. 장칭은 문화대혁명의 광기 어린 불화살을 저우언라이에게 연이어 쏘았고, 저우언라이를 둘러싼 성곽은 그렇게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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