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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우언라이 인물탐구 <13> 어린 학생들을 집어삼킨 문화대혁명의 불길(2)

롄둥(联动)의 활동에 장칭(江青) 등 중앙문혁소조의 소위 4인방은 불안을 느꼈다. 어린 학생의 도전이라고 가만히 있을 그들이 아니었다.

 

저우언라이(周恩来)가 먼저 위기를 느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롄둥의 뿌리는 베이징시 규찰대였고, 시청 규찰대는 국무원의 지도를 따르는 곳이었다. 문화대혁명의 혼란보다 안정을 추구했다. 지역의 안정에 힘을 쏟은 조직이 바로 롄둥이었다.


그러나 1966년 12월 12일 런민르바오(人民日报) 산하의 이론지 '훙치(红旗)'마저 이런 롄둥을 비판하고 나섰다. 모두 장칭 등 문혁 4인방이 뒤에서 힘을 쓴 것이다. 저우언라이가 고육지책을 썼다. 그는 롄둥이 소집한 집회에 참석해 "이제 롄둥 스스로 조직을 해산할 때"라고 말한다. 롄둥을 향해 독수를 준비하고 있던 장칭의 마음을 꿰뚫은 발언이었다.

 


그러나 장칭이 때를 놓칠 사람이 아니다. 장칭 등은 12월 18일 베이징 인민 대회당에서 홍위병 1, 2, 3 사령부 그리고 수도병단 대표 등을 접견한다. 그리고 이들 대학생 홍위병 조직이 고등학생 조직인 '롄둥' 조직을 진압하도록 선동한다. 
"반동에는 나이가 없다. 어린 학생들을 때려 잡아라!" 소위 중앙문혁의 명령이었다. 베이징이 다시 혼돈에 빠졌다. 당시 이미 홍위병들의 불법적인 구타, 구속 행위가 있어 이를 금지하는 조치가 내려진 상태였다. 장칭 역시 이를 잘 알고 있었다. 장칭은 이미 베이징시 공안과 이에 대한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너희들은 아이들을 붙잡으면 바로 경찰로 넘겨라. 지금 너희들이 구속하는 것은 안된다." 장칭은 대학생 홍위병들에게 이같이 당부했다. 1967년 1월 25일 오후 4시 대학생 홍위병 등 4만여명과 경찰이 동시에 장칭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다. 베이징 시내 주요 중고등학교를 포위하고 규찰대원 색출에 나섰다. 규찰대 학생들은 도처로 도망을 갔다. 


장칭은 특별히 몇몇 규찰대원들을 추적해 붙잡도록 했다. 이들 규찰대원들은 이른바 붉은 귀족으로 불리는 '훙얼다이(红二代)', 즉 공산 혁명 원로들의 자녀들이었다. 이들 가운데는 훗날 홍위병의 집단 비판을 받고 자살하는 저우언라이의 비서 쉬밍(许明)의 아들 쿵단(孔丹)과 국가 부주석 둥비우(董必武)의 아들 둥량허(董良翮)도 있었다. 

 

훗날 둥비우 부주석은 아들에게 "나 대신에 네가 고생을 했구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또 홍위병의 집단 비판의 굴욕을 받으며 쉬밍이 죽어가자 이 모습을 본 장칭은 그를 손가락질하며 규찰대 아들을 뒤에서 봐준 이였다고 욕을 했다고 전해진다.

 

무려 3개월여의 규찰대원 탄압이 자행됐다. 붙잡힌 규찰대원들은 대략 100여 명, 모두 베이징 1급 감옥에 수감됐다. 1967년 4월 22일에서야 장칭은 이들을 풀어준다. 이들은 그날 베이징 인민대회당 동대청에서 저우언라이와 회동을 한다.

중국 공산당 자료는 당시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인민 대회당에서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난 아이들은 마치 오랫동안 그리던 부친을 만난 듯했다. 아이들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고, 모두 울기 시작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아이들 가운데 몇몇을 호명해 무사한지를 체크했다. 장칭과 천보다 등 중앙문혁소조의 주요 간부들도 자리를 함께 했다. 이들은 모두 아이들이 풀려나는 것에 대해 인정을 하지 못하겠다는 태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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