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밀가루, 설탕, 시멘트 이렇게 세가지의 분말의 가격이 갑자기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1963년 한국의 상황이다. 밀가루 판매소에는 사람들이 길게 밤새 줄을 섰다. 설탕직매소마다 사람들이 줄을 섰다. 미리 사놓지 않으면, 아침에 100원하던 것이 저녁에는 150원으로 가격이 뛰었다. 1963년 동아일보는 이렇게 썼다. “‘밀가루 배급을 달라 소동’ 직매소마다 사람들이 줄을 섰다. 한 주먹의 설탕, 밀가루라도 더 사려 아우성을 쳤다.” 소위 삼분파동이 벌어진 것이다. 사실 삼분파동은 각기 다른 이유에서 발생했다. 설탕만해도 당시 세계 설탕원료의 대부분을 제공하던 쿠바가 서방세계에 원당 수출을 중지하면서 발생했다. 설탕 원료가 공급되지 않으니, 설탕 가격이 치솟았도 생산자 입장에서는 설탕을 만들 길이 없었다. 설탕이 품귀현상을 빚으니 ‘사재기’(물건을 사서 쌓아두는 것) 현상이 벌어졌다. 1963년 6월 6일 한근 600g에 50원하던 설탕이 자고난 다음날엔 75원으로 뛰었다. 4~5개월 사이에 설탕 값이 10배나 올랐다. 정부가 나섰다. 정부는 직매소를 두어 일종의 배급제를 시작했다. 한 사람당 한근 이하로 팔았다. 직매소에서는 시중보다 설탕을 싸게
“일하는 자의 발목을 잡는 것은 항상 일하지 않는 자다.” 이병철이 남긴 말이다. 지나면 지날수록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인다. 최소한 한국사회에는 그렇다. 뿌리 깊은 병폐다. 그의 아들 이건희는 삼성의 혁신을 강조하며 “차라지 가만히 있으라! 일하는 자의 발목을 잡지마라!”라고 했다. 일제 말기 정미와 술제조로 큰 돈을 벌 때만해도 조선의 그저 돈이 있는 여러 집안 가운데 하나였다. 전국적인 명성은 있었지만, 그 부가 전국 1, 2위를 아니었다. 그가 한국전쟁 직전 서울에 진출 ‘삼성물산’을 세울 때만 해도 삼성물산보다 큰 회사가 5,6곳이 있었다. 그런 삼성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1위에 올랐고, 부산에서 ‘제일제당’을 만들자 이병철의 부가 전국 1,2위를 다투기 시작했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고, 제일모직을 만들었다. 개인적으로 삼성그룹의 탄생에 있어 제일모직의 위치는 색다른 의미가 있다. 제일제당만해 국내 시장 장악이 목표였다. 단순히 설탕을 대체해 직접 제조하자는 게 목적이었다. 목표가 단순하니 이병철의 주변에서도 모두가 쉽게 돈이 된다고 봤다. 그러나 제일모직은 달랐다. 목표가 한국 시장을 넘어 세계 시장이었다. 한국의 회사들이 경쟁 상대가
“정말 자기 것인 것인지 알려면 버려봐라” 옛 선인들이 준 충고다. 소유라는 것은 내게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니다. 소유란 내맘대로 되는 것이다. 내 것은 저절로 내맘으로 그대로 된다. 내 맘대로 된 것이야말로 내 것인 것이다. 그런데 그게 영원히 내 것일까? 기업은 어떻게 소유하는 것일까? 삼성그룹의 영원한 숙제는 일찌감치 선대 이병철 때부터 시작됐다. 울산비료공장은 이병철, 또 지금의 삼성에게 기업 소유권을 어찌 유지해야하는 지 끝없이 고민하게 한 주인공이다. 울산비료공장, 제일제당, 제일모직을 성공시킨 이병철의 회심의 작품이었다. 한국 정부도 못하는 유럽 차관까지 모두 섭외를 해놓고도 한국 국내 정치 상황의 급변으로 이루지 못했다. 경제를 중시하는 혁명정부가 들어섰지만, 이병철은 울산비료공장을 적극 추진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상만으로 간단히 이병철의 자신의 계획을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버려졌던 울산비료공장 계획은 엉뚱한 순간 되돌아 왔다. 마치 자신의 진정한 소유주는 이병철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1963년 10월 한국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혁명정부가 정권을 민간에 이양한 조치였다. 그렇
우리나라의 지난달 주식 발행 규모가 기업공개(IPO) 물량을 중심으로 크게 늘었다. 28일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7월 중 주식 발행 규모는 5329억원에 달했다. 이는 전월보다 69.0% 증가한 것이다. 기업공개(IPO) 규모가 3447억원으로 126.9% 늘었다. 7월 IPO 건수는 13건으로 올해 들어 가장 많았다. 유상증자 발행액은 1882억 원으로 15.2% 증가했다. 지난달 회사채 발행 규모는 16조5202억 원이었다. 이는 전월보다 16.5% 는 것이다. 다만 자산유동화증권(ABS) 발행은 8384억원으로 59.8% 감소했다. 7월말 현재 회사채 미상환 잔액은 508조7696억 원이었다.
본래 정말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인생이 재미있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려고 그리 노력해 결국 그토록 원했던 별은 못 땄는데, 엉뚱하게 더 좋은 달을 따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병철과 울산공업단지의 경우가 그렇다. 이병철은 제일모직 성공이후 국가 재건을 위해 아시아 최대의 비료 공장을 꿈꾼다. 대부분을 외국에서 차관을 받아 짓는다는 게 기본 계획이었다. 이병철은 이를 위해 유럽을 돌아다녔고, 차관과 기술협력과 관련한 기본적인 협의를 해놓는다. 하지만 한국의 4.19혁명에서 5.16군사혁명까지 두 번의 연이은 혁명은 이병철의 비료 공장의 꿈을 좌절시킨다. 하지만 그 비료공장을 위한 노력이 이병철에게 무익했던 것은 아니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이병철은 해외 차관과 대규모 공장 건설을 위한 기술 지원 협의에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지니게 됐다. 이병철의 이 노하우가 발현된 것이 바로 울산공업단지다. 울산 공업단지는 한국의 경제 발전에 초석이 된 것이다. 본래 당시만 해도 군사혁명정부 내부에서는 경제개발과 관련한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모두가 경제발전을 위해 산업화가 필요하다는 데 이견은 없었다. 다
‘2100만 잔’ 지난 2017년 8월이래 한국인이 마신 스타벅스의 디카페인 커피 음료 수다. 스타벅스커피 코리아는 26일 디카페인 커피 음료가 출시 2년 만에 2100만잔 넘게 팔렸다고 밝혔다. 스타벅스에 따르면 이는 과거 1년 만에 1000만 잔이 팔린 기록을 넘어선 것이다. 스타벅스는 “첫해보다 많은 판매량을 기록했다”고 말했다. 스타벅스 디카페인 에스프레소는 화학 물질 대신 이산화탄소를 이용한 공정을 이용한 것이 특징이다. 원두도 국내 식약처 기준에 맞는 디카페인 원두를 쓴다. 이산화탄소 공정은 다른 카페인 제거 공정보다 높은 투자비가 발생해 원두 가격이 높지만, 커피의 맛과 향을 완벽히 유지한다는 장점을 갖고 있다. 스타벅스에 따르면 디카페인 음료의 수요자는 30대가 전체의 54%로 가장 많았다. 20대 23%, 40대 17% 순서로 나타났다. 성별로 보면 여성이 81%로 남성 19%를 압도했다. 디카페인 음료 가운데에서는 디카페인 카페 아메리카노가 35%를 차지했다. 이어 디카페인 카페 라테가 19%로 그 뒤를 이었다.
“중공업만이 한국을 살릴 수 있다.” 한국 경제인협회의 회장을 맡은 이병철은 이렇게 판단했다. 협회 회원들의 논의 결과도 같았다. 이 같은 내용은 즉시 박정희를 수뇌로 한 혁명정부에 전달됐고, 채택됐다. 군인들의 장점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빠르게 결정하고 대단한 추진력을 보였다.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병철과 경제인협회 회원들은 미국과 일본을 찾아 우리 중공업 산업 부흥 계획을 알리고 투자를 요청했다. 하지만 토끼가 마음을 고쳐 먹는다고 호랑이가 될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해외의 시각도 그랬지만, 내부의 문제도 많았다. 무엇보다 이병철 수준의 경영을 이해하는 한국 경영인도 드물었다. 이병철의 자서전에는 이런 사례가 있다. “자금이나 기술 면에서 난처한 사람이 생기면 일본의 경제단체나 개인에게 연결시켜 주고 미국이나 구주(유럽)에도 알선하여 여러모로 서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중에는 경영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없고 겉으로만 공장건설 계획을 내세울 뿐, 구체적으로는 아무런 준비도 없는 한심한 사람도 있었다. 중공업에 참여하겠다는 사람이 있어 일본에 동행하여 가와사키川崎 제철 사장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도대체 이야기가 되지 않으
5.16 군사 정권의 국정 운영의 핵심은 하나도 경제 건설, 둘도 경제건설이었다. 그 뒤가 바로 안보였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정권세력은 ‘과감’이라는 군사정권을 특징을 그대로 살렸다. 각종 경제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과감하게 실천했다. 사실 어떤 계획도 실천보다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훌륭한 계획이라도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물론 좋은 결과를 위해 좋은 계획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고려 없이 각종 이상만을 담은 실천할 수 없는 계획은 이미 좋고 나쁨의 평가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선과 색을 넣으면 그림은 지저분할 수밖에 없고, 완성될 수 없는 이치다. 바로 4.19 혁명 정권의 한계였다.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순수한 국민의 힘이었다. 탱크와 총에 몸으로 맞섰던 일반 학생 국민들의 용기였다. 그러나 그 혁명으로 정권을 얻은 시민 정부는 너무나 무력했다. 수많은 주장들이 서로 맞섰고, 양보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거리로 나서 시위를 했다. 학생들은 학생대로, 공장의 공원들은 공원대로, 심지어 경찰도 경찰대로 시위를 했다. 어느 한 곳 옳지 않은 주장이 없었고, 그래서 어느 하루 혼란하지
한국 사회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병철은 협상의 달인이었다. 그는 협상을 해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어냈다. 한국 정부는 물론 일본, 독일 등 외국 정부의 지원도 이병철은 협상을 통해 이끌어냈다. 사실 한국에서는 ‘고 이병철 회장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가?’를 놓고 단순히 “정경유착을 통해서”라고 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는 큰 오해다. 무엇보다 정경유착 부분만 봐도 각 시대마다 이병철 보다 더 정권에, 권력에 유착된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모두가 현재의 삼성보다 성공하지 못했다. 사실 정경유착이라는 게 그렇다. 한국같은 민주 사회에서 10년 이상을 가는 권력은 없다. 이승만, 박정희가 장기 집권을 했지만 어느 누구도 50년을 넘지는 못했다. 그러니 정경유착은 반드시 말로가 비참했다. 정권이 바뀌었는데, 전 정권과 유착을 했던 이들이 새로 정권을 잡은 이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병철은 시대를 넘어 매 정권마다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승만 정권은 결국 당대 이 땅에 있던 은행 5곳의 지분을 이병철의 삼성에 넘겼다. 이어 4.19 혁명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려 탄압을 받았지만, 이병철은 당당했다. 당시 하늘의 새도 떨어뜨
이병철이 김포 공항에서 청년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엉뚱하게도 명동의 메트로 호텔이었다. 그곳에서 이병철은 가족과 통화를 한다. 가족에게 우선 자신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그 곳에서 박정희 혁명정부 최고회의 부의장을 만나 담판을 한다. 당시 상황은 이렇다. 이병철이 4.19 혁명정부의 전횡에 낙담해 일본에서 유유자적을 하고 있을 때 4.19혁명이후 혼란한 사회를 안정시키겠다며 1961년 5월 16일 군사 혁명이 일어난다. 혹자는 정변이라고도 한다. 4.19 혁명이 일어난지 불과 1년만의 일이다. 사실 이병철의 자서전에도 고백하고 있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의 갑작스런 붕괴이후 한국은 국정 운영의 주체가 없었다. 도심에서는 경찰과 학생, 노동자들이 각자 자신들의 주장을 하며 시위를 벌였다. 나라가 온통 주장뿐 이었다. 군사 혁명 정부는 빠르게 나라를 안정시켰다. 국민들의 불만도 빠르게 잠재웠다. 그 중 하나가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처벌이었다. 4.19 혁명 정부 역시 국민들의 욕구불만을 덜어주기 위해 이병철을 부정축재자로 몰았다. 이병철은 당당히 “말도 안되는 세금을 부과하고 그 것을 내지 못했다고 부정축재자로 모는 게 문제”라고 맞섰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