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习近平) 중국 국가 주석의 아시아 순방이 끝났다. 대단히 성공적이었다는 게 중국 안팎의 공통된 평가다. 특히 미국 주류 매체들은 자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 결과는 폄하하면서도 시 주석의 성과는 높게 평가했다. 뉴욕타임스는 “트럼프의 아시아 순방이 시 주석을 빛나게 했다"라고까지 평했다. 이 같은 시 주석의 아시아 순방에서 자리에 없어 더욱 주목받은 인물이 있다.
바로 중국의 '3대 책사’라 불리는 왕후닝(王沪宁)이 그 주인공이다. 뉴욕타임스는 최근호에서 이번 시 주석의 아시아 순방 일정 곳곳에 왕후닝의 흔적이 있다며 “왕후닝이 배석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각본 그대로 진행됐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라고 평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 14일 자 지면을 크게 할애해 올 63세의 왕후닝 이력과 생각을 상세히 소개했다. 그 가운데는 우리 역시 주목할 대목이 적지 않다.
뉴욕타임스가 그의 제자 등을 취재한 결과, 당시 왕후닝은 이미 “서구 현대화는 물질적 풍요는 가져다줄 수 있지만, 인격의 품위를 높여주지는 않는다"라고 생각했다. 그는 80년대 말 상하이에서 ‘신권위주의’를 주장해 주목을 받았다.
왕후닝은 법학과 사상 전공의 이론가답게 논변에 뛰어났다. 한 번은 그가 그의 대학 제자들과 함께 싱가포르에서 열린 논변 대회에 참여해 대만 대표를 5 대 0의 점수로 누르고 완승을 한 적이 있다. 당시 논쟁은 성선설과 성악설을 서로 주장하는 것이었는데, 왕후닝의학생들은 성악설을 논증했다. 당시 그는 회초리를 상징적으로 교단에 세워놓고 학생들을 훈련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 그가 학생들을 때린 적은 없다는 게 그의 제자들의 회고다.
중국의 대다수 지식인들이 개혁개방과 함께 서구식 자유민주주의에서 중국 발전의 답을 찾을 때 왕후닝은 전혀 다른 생각을 했다고한다. 중국은 보다 강력한 지도력이 있어야 현대화를 더욱 효율적으로 이룰 수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고 뉴욕타임스는 전했다. 민주주의는 현대화를 이루고 나서의 과제라는 것이다. 이것이 왕후닝의 신 권위주의 사상이다.
그는 89년 중국 천안문 사태를 앞두고 베이징(北京)과 상하이에서 번진 자유주의 운동에 거리를 둔다. 천안문 사태 직후 장쩌민(江泽民)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