支石墓是青铜器时代石墓的一种,是与埃及的金字塔和英国的巨石阵一样的巨石文化产物。支石墓不仅分布在中国东北部地区,还分布在日本,目前韩国保留了最多的支石墓。这意味着韩半岛曾经是青铜文化的中心地。它作为一个能够展现史前时代葬礼文化的遗迹,保存价值在世界上得到了认可,于2000年被登记为联合国教科文组织世界文化遗产。
笔者 淸露 提供图片 文化财厅
글 = 청로
江华富近里支石墓是将埋葬着遗骸的石房露在地面上的韩国最大北方式支石墓。
《亲爱的,不要跨过那条江》是2014年上映的韩国纪录片电影。讲述了89岁怀有少女情怀的姜溪烈老奶奶和98岁却依然浪漫绅士的曹炳万老爷爷的爱情故事。两位老人无论去往哪里,总会穿上色彩明亮的情侣韩服,两只手紧紧地牵在一起。
某一天,老爷爷心爱的小狗“小不点”突然死去了。老夫妻埋掉小狗归来后,老爷爷的体力渐渐不支。“现在真的要准备离别了吗?”老奶奶的心就要碎了。
老夫妻的爱情如此美丽,是因为他们面临着死亡。无论是谁,死亡都会踏着公平的步伐来敲门的,但是并不是所有人都会像这对老夫妻一样面对它。
重新回到几千年前的话会怎么样?不太理性的那个时代会是什么样的呢?也就是说公元前3000年前左右。虽然有点荒唐,但这是在观察江华岛的支石墓遗址时想到的。
保存状态很好的和顺支石墓出土文物(石器类)。
放在小小的石头垫上的巨大石头,就像是死亡的重量。希望灵魂飞不散,在漫长的岁月里就那么沉重地一动不动地杵在那里。好像是在诉说“亲爱的,千万不要跨过那条江”一样,这也许是放那个石头的人们真实的心愿。
许多人,甚至连韩国人都不太了解,其实全世界支石墓最多的地方是韩国。支石墓象征着新石器时代和韩半岛青铜器时代独特的文化。当然,支石墓还分布在中国的东北部地区及日本。即便如此,大部分还是留在了韩半岛。考虑到韩国这个文化留下的痕迹最多,可推测,韩半岛曾经是青铜文化的中心地。
支石墓分布在韩国的江华、高敞、和顺等地。分布密集,形式多样,其保存价值在世界上得到认可,于2000年12月被登记为联合国教科文组织世界文化遗产,获得了“展现出了公元前2000至3000年葬礼文化的出色遗址”的评价。
韩国最大的支石墓群密集的高敞竹林里支石墓群。
支石墓还被称为多尔门(dolmen)。通常被分为北方式和南方式。北方式就是在地上立起四个石板做成长方形的石房,在那上面盖上又大又平的石头。将埋葬着遗骸的石房露在地面。
南方式的支石墓埋葬设施的主要部分在地下,也就是只可以看到外部的像围棋盘一样的大石头,因此还被称为围棋盘式。由于南方式的垫石并不那么重要,没有的情况也很多。
南方式支石墓的代表就是高敞支石墓群(史迹第391号)。高敞支石墓群遗址以全罗北道高敞郡竹林里梅山村为中心,东西1,764米范围内分布着440座支石墓。当然,这个地方并不只有南方式支石墓。还分布着北方式(桌形)、地上石椁形等多种形式和大小的支石墓。高敞拥有韩国最大最密集的支石墓群。
和顺支石墓周围的自然景观也保存得非常完好,是一个研究韩国古代文化和生活的重要遗迹。
和顺支石墓遗址指的是被指定为韩国第410号史迹的和顺孝山里及大薪里一带的支石墓群。和顺支石墓遗迹沿着全罗南道和顺郡道
谷面孝山里、春阳面大薪里一带的溪谷分布,在约10公里长的范围内,集中分布着500余座支石墓群,最近被发现其保存状态良好。这一带还有能够展现支石墓建筑过程的采石场,是一个可以了解当时打磨石材的技术、筑造及搬运方法等的重要遗迹。
韩国最大的北方式支石墓是江华支石墓遗址,它有包括江华支石墓(史迹第137号)在内的内可支石墓(仁川纪念物第16号)、江华大山里支石墓(仁川纪念物第31号)、江华富近里支石墓(仁川纪念物第32号)等。沿着高丽山山脚分布,总共有120余座支石墓。这里是通过密集分布图和多样的形式来推究支石墓的形成与发展过程的重要遗址。
埋葬设施的主要部分在地下的南方式支石墓——高敞围棋盘式支石墓。
看着放在秋天的田野上的支石墓,让我们再次感受一下,在有限的生活中的回忆,是超越数千年无限延续着的。
한국 문화의 자랑 고인돌
청동기시대의 돌무덤의 일종인 고인돌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영국의 스톤 헨지와 같은 거석문화의 산물이다. 고인돌은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일본까지 분포돼 있으며, 특히 현재 한국에 가장 많이 남아있다. 이는 한반도가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의미이다. 선사시대 장례 문화를 보여주는 뛰어난 유적으로, 세계적으로 보존할 가치를 인정받아 2000년에 유네스크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지난 2014년 나와 온 한국인을 울린 다큐 영화다. 89세 소녀감성 강계열 할머니, 98세 로맨티스트 조병만 할아버지의 사랑이야기다. 두 노인은 어딜 가든 고운 빛깔의 커플 한복을 입고 두 손을 꼭 잡고 걷는 언제나 신혼인 노부부이다.
그런 어느 날 할아버지가 귀여워하던 강아지 ‘꼬마’가 갑자기 죽는다. 꼬마를 묻고 함께 집으로 돌아온 이후부터 할아버지의 기력은 점점 약해져 간다.
‘이제 정말 이별을 준비해야 하는가?” 할머니의 마음이 미어진다.
노부부의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죽음을 앞두고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는 죽음, 그러나 모두가 노부부 같이 맞지는 못한다.
다시 수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어떨까? 보다 덜 이성적이었던 그 시대는 어땠을까? 한 기원전 3000년 전쯤 말이다. 좀 엉뚱한 이야기지만 강화도의 고인돌 유적지를 살피면서 든 생각이다.
작은 돌 받침 위로 놓은 거대한 돌, 마치 죽음의 무게처럼 느껴진다. 가벼운 영혼이 날아 흩어지지 않도록 기원하듯, 그리 묵직하게, 오랜 세월 속에 흔들리지 않고 그리 놓여져 있다. 마치 ‘님아 제발 그 강을 건너지 마소” 호소하듯이. 아마 그 돌은 놓았던 이들의 실제 바람이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이들, 심지어 한국인들도 잘 모르는 것이 이 고인돌이 전 세계 한국에 가장 많이 분포돼 있다는 것이다. 신석기시대와 한반도 청동기 시대의 독특한 문화를 상징하는 게 바로 이 고인돌이다. 물론 고인돌의 분포지역은 중국 동북부 지역에서 일본까지 분포돼 있다. 그래도 가장 많은 수는 한반도에 남아있다. 한 문화를 생각해보면 그 문화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은 곳이 바로 그 문화의 중심지다. 즉 한반도가 청동기 문화의 중심지였다는 의미다.
한반도에서도 강화, 고창, 화순 등지에 분포되어 있다. 고르게 밀집된 형태가 세계적으로 보존할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2000년 12월 유네스크 세계유산으로 등재됐다. 기원전 2000~3000년 시대 장례 문화를 보여주는 뛰어난 유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고인돌은 지석묘(支石墓)라고 하고 돌멘dolme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흔히 북방식과 남방식으로 구분된다. 북방식은 네 개의 판석을 세워 장방형의 돌방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하고 평평한 돌을 뚜껑돌로 올려놓는다. 유해가 매장되는 돌방을 지상에 노출시키는 것이 뚜렷한 특징이다.
남방식은 매장 시설의 주요부분이 땅 속에 들어간다. 즉 바둑판 같은 큰 돌만 외부에 보여지는 특징이 있다. 바둑판식이라고도 한다. 남방식은 따라서 받침 돌이 크게 중요하지 않아 없는 경우도 많다.
남방식 고인돌의 대표적인 사례가 고창 지석묘군(사적 391)이다. 고창 고인돌유적은 전라북도 고창읍 죽림리 매산마을을 중심으로 동서 1,764m 범위에 440여 기가 분포되어 있다. 물론 전적으로 남방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북방식, 지상석곽형 등 다양한 형식과 크기의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다. 고창은 한국에서도 가장 큰 고인돌 군집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다.
화순 고인돌유적은 사적 제410호로 지정된 화순 효산리 및 대신리 지석묘군을 말한다.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효산리 모산마을에서 춘양면 대신리로 넘어가는 보성재의 양쪽 계곡에 500여 기의 남방식 고인돌이 10km 정도에 걸쳐 분포해 있다. 보존상태가 매우 좋은 것이 최대 장점이다. 이 일대에는 고인돌의 축조과정을 보여주는 채석장이 있어 당시의 석재 다루는 기술과 축조 및 운반방법 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한국 최대의 북방식 고인돌은 강화 지석묘(사적 137)를 비롯하여 내가 지석묘(인천기념물 16), 강화 대산리 고인돌(인천기념물 31), 강화 부근리 점골지석묘(인천기념물 32) 등을 포함하는 강화 고인돌유적이다. 고려산 기슭을 따라 총 120여 기의 고인돌이 분포해 있다. 밀집분포도, 형식의 다양성으로 고인돌의 형성과 발전 과정을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 가을 들녁에 놓인 고인돌을 보면서, 유한한 삶 속에 삶의 추억들은 수천년을 넘어 무한히 이어지고 있음을 다시 한번 느껴보자.
글 = 청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