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G엔터테인먼트 활동 정지 청와대 청원이 제기되자 중국 네티즌들이 논란을 벌이고 있다. 12일 한국 네티즌들이 YG엔터테인먼트 소속 연예인들이 끊임없이 마약사건에 말려들어, 모든 연예활동 정지 요청을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올리자 중국 웨이보에 이 소식이 핫이슈 1위에 올라갔다. 많은 네티즌들은 “개인 행위가 왜 회사 사람이 책임을 져”, “극단적이다”는 글을 올리며 이런 행위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일부 네티즌들은 “한국 네티즌들이 대단하다”, “중국 빠순이들 보고 쫌 배워라”라고 지지를 표했다.
일본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앞두고 가장 주목을 받는 것은 미국과 중국이다. 두 나라간의 ‘무역전이 확전할 것이냐, 휴전할 것이냐?’에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아쉽게도 현재까지 진행상황을 보면 녹녹치 않다. 두 나라 담당자들은 주요 외신에 “최근 분위기가 좋지 않아 두 정상의 회담을 앞두고 준비가 부족한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미중 무역협상은 지난 5월 10일 이후 답보 상태에 빠져있다. 이후 미국과 중국 담당자들의 미팅은 중단된 상태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마퀴스(Garrett Marquis) 대변인은 “회담 준비는 현재 진행되고 있다. 아직 뭐라고 전할 내용은 없다”고 밝혔다. 백악관 경제고문 라리 쿠들로는 “트럼프 대통령이 양국정상회담에서 논의가 중단된 문제들을 다시 언급할 것”이라고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의 성공 가능성을 언급하면서 함께 “중국의 양보가 부족하다”며 위협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바로 당일 중국 외교부는 “중국은 경제 개방과 미국과 무역회담에 개방적인 태도”라 강조하면서도 “양국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아직 밝힌 내용이 없다”고 선을 그었다. 중국 외교부는 그 전 주만해도 “미국이 무역 마찰을 원한다면 우리
YG엔터테인먼트 소속 아이돌 그룹 아이콘(iKON)의 리더 비아이(B.I·김한빈)가 마약 의혹에 휩싸이면서 중국팬들이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다. 11일 디스패치가 비아이가 지난 2016년 4월 마약류 위반 피의자 A씨와 나눈 마약 관련 카카오톡 대화를 입수했다고 보도하자 비아이는 다음날인 12일 인스타그램에서 맴버과 팬들에게 사과하며 그룹 탈퇴를 발표했다. 비아이의 마약 의혹 소식이 전해지자 웨이보에서 핫이슈로 떠올랐다. 일부 네티즌들은 “못 믿겠다”, “불쌍하다”는 글을 올리며 동정심을 표했지만, 다른 네티즌은 ‘한국정부는 YG와 연예인을 철저히 조사하라“며 ”(YG)가 마약회사냐“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엑소(EXO) 백현이 데뷔 7년 만에 솔로 데뷔를 발표하자 중국 팬들이 환호하고 있다 백현 소속사인 SM엔터에인먼트가 10일 ‘백현이 개인 앨범 준비중이며, 7월 발매 예정’이라고 발표하자 웨이보에는 하루 종일 팬들의 글이 어어졌다. 한 팬은 “솔로 완전 기대된다”며 “그의 아름다운 곡이 반복된다”고 했고, 다른 팬은 ‘엑소의 팬으로 기분 좋다“며 ”(앨범 발매되면) 한 장 산다“는 글을 올렸다. 백현은 엑소에서 첸(Chen)이후 두 번째로 솔로로 활동하게 된다.
베이징을 포함한 전국 260개 도시에서 통합 교통카드가 시행된다. 이에 따라 이들 도시에서는 지하철과 버스 등 대중교통을 교통카드로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게 된다. 중국뉴스웹사이트(中国新闻网)에 따르면 올해 전국 260개 지급(地級) 이상 도시에서 도시교통카드 통행 시행할 예정이다. 승객들은 카드를 구매하면 베이징 포함한 260개 도시에서 지하철, 버스를 탑승할 수 있다. 통합 교통카드 시행을 두고 네티즌들은 갑론을박을 벌이고 있다. 한 네티즌은 “굳이 교통카드를 써야하지? 핸드폰이 더 편리한데”라고 비판을 했지만 다른 네티즌은 “이제 고향 내려갈 때 잔돈 찾지 않아도 되겠다”며 환영했다.
덩샤오핑의 이 편지는 당장 마오쩌둥에게 전달되지는 못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연금 상태였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의 편지는 각종 심의를 거쳐 1972년 8월 4일에야 비로소 마오쩌둥 손에 쥐어지게 된다. 편지를 읽은 마오쩌둥은 이렇게 입장을 밝혔다. 과거 소련에 의해 내가 숙청 위기에 처했을 때 덩샤오핑은 끝까지 내 편을 들어줬다. 그가 역사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없다. 단 한 번도 적에게 투항한 적이 없다. 전공도 혁혁하다. 건국 이래 공도 있다. 이 이야기는 과거에도 많이 했지만, 내 다시 한번 언급한다. 연금 상태의 덩샤오핑에게는 사실상 면제 부가 주어진 것이다. 옆에서 마오의 이 같은 언급을 들은 저우언라이周恩来는 바로 그 사실을 깨달었다. 사실 세상에 누가 있어 저우언라이보다 마오쩌둥의 한마디 한마디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저우언라이는 바로 사무국에 연락해 조치를 취한다. 당장 덩샤오핑의 편지와 마오 주석의 발언을 문서로 작성해 정치국 간부들에게 열람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 자신도 8월 15일 정치국 회의 석상에서 다시 한번 덩샤오핑의 편지와 이에 대한 마오쩌둥의 평가를 언급한다. 조금씩 덩샤오핑의 복권을 공식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덩샤오핑 복권의 여론 형성으로 사례 같은 책에는 저우언라이가 어떻게 덩샤오핑의 복권을 위해 당 내부 여론을 형성했는지 보여준다. 또 당 내부의 미약한 움직임을 확실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 당 외부의 여론을 만들어 갔는지 보여준다. 이 사례는 마치 한나라 유방이 자신의 황위를 당초 결정했던 황태자가 아니라, 다른 아들에게 물려주려고 하자 한나라 건국 대신들이 황태자를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줘 유방의 마음을 변치 않게 했다는 중국 고사와 비슷하다. 이 사례를 알기 위해 등장하는 인물이 천이다. 천이陈毅, 중국 공산당의 공간이다. 1901년 쓰촨四川 출신으로 1919년 프랑스에서 주경야독을 한 인재다. 1921년 프랑스 중국 유학생들의 애국운동에 참여했다. 추방돼 1922년 중국 사회주의 청년단에 가입한 중국 공산당 초기 원로다. 1955년 원수 칭호를 받았고 군사위 부주석까지 지냈지만, ‘2월 역류’로 1969년 스자좡石家庄에 유배된다. 2월 역류는 중국 공산당 원로들의 문화대혁명 주세력인 린뱌오林彪를 강하게 비판한 사건을 말한다. 린뱌오는 소련과 관계가 악화되자, 이를 이용해 자신의 반대파를 전부 베이징北京에서 쫓아낸다. 그렇게 쫓겨난 천이는 1971년 1월
1966년 8월 1일 마오쩌둥毛泽东은 중국 공산당 8기 중앙정치국 11차 전체회의(이하 11중전회)를 연다. 이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문화대혁명의 창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명확히 보여준다. 문화대혁명은 소위 무산계급의 독재를 위해 반대파를 제거하는 정치적 운동이라는 것이 분명해진 것이다. 마오쩌둥이 발동을 건 문화대혁명의 창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저우언라이周恩来도 점차 문화대혁명 시대 '방패'의 역할을 본격화하기 시작한다. 문화대혁명의 창과 방패, 바로 중국 공산당 당사가 규정한 소위 문화대혁명 사인방과 저우언라이의 관계다. 1966년 8월 1일로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11중전회 회의는 처음부터 잔뜩 긴장된 모습이었다. 초반부터 마오쩌둥은 비판의 소리를 높였다. 지금 당 중앙이 대학 혁명 현장에 공작조를 파견해 어느 것 하나 좋은 결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공작조 90% 이상이 나쁜 짓만 한다. 군중을 억제하고, 제어하려고만 한다. 이어 마오쩌둥은 회의 첫날 바로 칭화清华대학 부속 중학 홍위병에게 편지를 쓴다. 이 어린 학생들은 당 중앙이 파견한 공작조 활동을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있었다. 마오는 편지에서 "어린 학생들의 혁명 정신에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당 중앙만 몰랐던 문화대혁명의 여론 형성 과정 이 사건은 당대 무소불위의 마오쩌둥이라도 당내 여론이 형성되지 않으면 쉽게 전횡을 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오쩌둥은 아내 장칭 등을 이용해 자신의 말을 잘 듣지 않는 당중앙을 우회해 상하이 문회보에서 작은 사건을 일으키고 그 것으로 중앙을 공격하도록 한다. 나중에 마오쩌둥 본인이 중앙 공격의 선봉장이 된다. 1965년 11월 중국 전역을 10여 년 휩쓴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불씨가 타오른다. 불길은 중난하이가 아니라 저 멀리 상하이에서 시작됐다. 상하이上海에서의 이 같은 움직임을 류샤오치刘少奇나 저우언라이周恩来 등 당대 중난하이中南海 지도자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중난하이와 먼 곳에서 은밀하게 진행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도자들이 정신없이 바빴다. 당시 중국은 대약진운동의 실패 이후 나라살림이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류샤오치, 저우언라이, 천이 등 당대 중국 지도자들은 모든 역량을 경제 회복에 집중했다. 자연히 나라살림을 책임진 총리 저우언라이는 그중에서도 가장 바쁠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가뭄 등 자연재해가 지속돼 저우언라이를 괴롭혔다. 전국 주요 피해지역의 가뭄대책 현황을 점
중국에서 여론이란 무엇인가? 여론 정치란 무엇인가? 중국에서 시민의 목소리를 전하는 서구 형태의 여론 제도가 없어 마치 여론이란 게 없지 않냐는 오해를 불러 온다. 어차피 공산당이 원하는 대로 말하는 게 중국의 여론 매체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틀린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이 같은 생각이 맞는 것도 아니다. 중국은 당내 여론, 또 그 당내 여론을 주도해 군중 여론을 이끄는 자체가 하나의 여론정치의 과정이다. 중국은 상상을 초월하는 대국이다. 사람이 많다는 게 문제다. 소위 당 중앙이라 불리는 중앙위원회 위원수만 204명(17기), 후보위원만 167명에 달한다. 지방조직만 31개 성이 있다. 중국 전체 공무원수는 716만7000여명에 달한다. 이들을 하나처럼 움직이도록 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 공산당 당내 여론을 하나로 만들어 가는 과정도 마찬가지로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 공산당은 일당 독재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당내 여론 통일은 필수적인 일이다. 공산당 당내 여론 공작이 그렇게 어렵고 중요하다는 말이다. 그 다음이 8000만 이상의 공산당원의 수배인 15억 국민이다. 당내 여론을 만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은 데 15억 인구의 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