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적 자원 외에는 자원다운 자원을 갖지 못한 한국으로서는, 원자재를 수입하여 그 것을 다양한 상품으로 가공하여 수출해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한국이 사는 유일한 길이다." 이제는 제조업이다. “사장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3억 원 가량 비축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하시고 싶은 사업을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런 기대도 없이 피난차 갔던 고향에서 이병철이 들은 말이다. 3억 원. 지금도 적지 않은 금액이지만, 당시 한국 상황에서 정말 일반인은 꿈도 꾸기 힘든 액수다. 한국에 80년까지 백만장자라는 말은 있어도 억만장자라는 말은 있지도 않았다. 이병철은 이에 이렇게 적었다. “전락으로 인심이 자못 황폐해진 때가 아니던가. 이렇게 정직하고 믿음직한 사람들이 또 있을까. 감동되어 가슴이 메었다. 익자삼우益者三友요, 손자삼우損者三友라 했다. 정직한 자를 벗으로 하고, 미더운 자를 벗으로 하고 견문 많은 자를 벗으로 함은 익이요. 아첨하는 자를 벗으로 하고 성실치 못한 자를 벗으로 하고 말만 앞세우고 실이 없는 자를 벗으로 함은 손이라고 했다. 또는 순경順境은 벗을 만들고 역경逆境은 벗을 시험한다는 말도 있다. 선인들의 가르침을 새삼 되씹
다시 무에서 시작 제일제당 공장 착공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호암 (1953) ⓒ삼성그룹 '한국전쟁’으로 삼성물산공사는 무로 돌아가 버렸다. 인천과 용산의 보세 창고에 보관돼 있던 손질 상품도 깨끗이 없어졌다. 용산 창고의 것은 공산군이 약취해 갔고, 인천 창고의 것은 공산군이 미처 약취하기 전에 국군이 서울을 탈환했을 때 혼란의 틈을 타서 한국의 어느 유력자가 가로채 착복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전쟁은 이렇게 세상을 도적의 것으로 만들었다. 적도 아군도 전쟁의 극한에서는 모두 도적이 됐다. 초반 전세는 절대적으로 남한에 불리했다. 서울을 점령한 공산군은 한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6월 25일 침략을 시작해 8월에는 이미 대전 남쪽까지 밀고 내려갔을 정도다. 그러다 9월 15일 인천상륙이 성공하고, 28일에는 서울이 수복된다. 서울 수복과 함께 확인된 것은 삼성물산공사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특히 인천 창고의 물건을 되찾기 위해 삼성 간부들이 나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서울이 다시 북의 손에 넘어가면서 재판은 한번도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이병철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1년 남짓한 짧은 동안에 기존 대회사와 비견할 만
고난 속에 깨달은 나라와 경제의 중요성 한국 전쟁은 이병철에 무슨 의미였을까? 당연히 첫 감성은 혼란과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적군의 탱크가 시내에 진입을 하고 총칼을 든 병사들이 이전 정권하에 잘 먹고 잘 살던 사람들을 잡으러 다닌다. 이병철은 당대 서울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당연히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이 전부였을까? 그가 말년에 쓴 자서전에 따르면 꼭 그렇지는 않았다. 우선 정부에 대한 실망, 사업을 하며 돈을 벌어온 그동안 자신의 생의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공산체제에 대한 분노, 나라 수호에 대해 절실함 등등이 그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글 속에 그대로 묻어나 있다. 우선 불안과 두려움이다. 그의 자서전에는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하기 전날 밤의 표정이 이렇게 기록이 돼 있다. “불퇴전不退轉의 결의로 서울에 이주하여 동분서주하면서 무역업을 겨우 궤도에 올려놓은 무렵이었다. 기업 경영을 다소 알게 되고, 개인적인 축재에서 벗어나 국에 기여할 수 있는 기업 활동의 참 뜻과 기쁨을 되새기고 다짐하면서, 포부에 부풀어 있던 바로 그 때 동란의 발발은 충격적이었다. ‘사업은 어떻게 되나, 그 보다
삼성, 크고 많고 강하고, 영원히 빛나라 이병철은 그렇게 새로 시작을 한다. 대구 수성시장 인근의 250평 남짓한 사무실을 빌려 삼성상회를 설립한다. 작지만 그래도 소위 무역회사였다. 건어물 같은 식품 등 생필품을 주로 교역하는 회사였다. 2개월간의 대륙 여행을 통해 선택한 것이었다. 이병철은 무역업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혔다. “조사 여행 결과 청과물과 건어물과 잡화 등의 무역이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상생활에 불가결한 것이므로 소비도 늘어날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의 무역을 담당하는 전문가는 없었다.” 당대는 일본이 중국 침략을 시작하면서 생필품이 품귀현상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이병철은 사업 성공의 기본으로 3가지를 꼽았다. 정확히 시대의 변화를 읽을 것, 풍부한 자본을 가질 것, 좋은 인재를 확보할 것 등이다. 이병철의 사업 판단 기준은 단순하지만 정확했다. 본래 사업이란 단순하면서도 비전이 명쾌해야 성공하는 법이다. 바로 오늘날 삼성 성공의 최대 비결인 셈이다. 그리고 이병철은 사업 목표로 역시 세 가지를 꼽았다. 크고, 강하고 많아야 한다. 이병철의 그의 자서전에서 삼성의 ‘삼’은 이 세 가지를 의
청년의 실패야말로 그 자신의 성공의 척도다 도로 제자리! 한참을 노력해 나갔다고 생각했으나 돌아보니 제자리다. 보통 사람이라면 그냥 주저 앉는다. 다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힘 쓰면 뭐하나?’ 하는 게 일반인들의 생각이다. 특히 이병철의 실패는 당대 조선 최고의 부자에서 바닥으로 떨어진 것이다. 그만큼 충격이 남달랐다는 의미다. 쌀 도정사업과 함께 운송사업을 하면서 돈을 모으고, 은행 자금을 이용해 29살의 젊은 나이에 200만 석 대지주가 됐던 이병철이었다. 이병철이 밤마다 요정에서 술과 연회로 시간을 보내도 전문 관리인들이 알아서 이병철의 은행계좌에 쓴 돈보다 몇 배 많은 돈을 채워 넣었다. 그런 재산이 ‘일장춘몽’이라더니, 하루 아침에 모두 날아간 것이다. 이런 실패를 경험한 보통 사람이라면 그 좌절에서 벗어나기 힘든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병철은 달랐다. 그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나는 항상 청년의 실패를 흥미롭게 지켜본다. 청년의 실패야말로 그 자신의 성공의 척도다. 그는 실패를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리고 어떻게 거기에 대처했는가, 낙담했는가, 물러섰는가, 아니면 더욱 용기를 북돋아 전진했는가, 이것으로 그의 생애는
미국과 중국의 무역마찰이 갈수록 극심해지고 있다. 미국은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 하고, 중국은 중국도 존중받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 한다. 과연 둘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 주제를 놓고 미국을 가장 잘 아는 중국인으로 꼽히는 추이톈카이 주미 중국대사와 중국은 가장 잘 아는 미국인으로 꼽히는 윌리엄 코헨 전 미 국무부 장관이 대화를 했다. 미중 수교 40주년을 맞아 미국 싱크탱크인 전략과 국제문제 연구소 주최 세미나에서다. 14일 자유아시아 방송은 세미나에서 추이톈카이와 코헨의 대화를 잘 정리해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추이톈카이와 코헨은 미중 간 협력과 대화가 필요하다고 공감하면서 양국 간에 신뢰 부족의 책임을 서로 떠미는 모습을 보였다. 코헨은 과거 40년 동안 유지된 미국 중심의 세계가 그대로 유지되야 한다는 입장을 보인 반면, 추이톈카이는 중국은 중국이 원하는 방식대로 발전하고, 그 지위를 인정받아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보도에 따르면 추이톈카이나 코헨은 모두 미중의 공통 이익이 양국 관계를 지금까지 유지시켰다는 의견을 같이 했다. 추이톈카이 "이러한 공통 이익은 계속 늘었다"라며 "특히 무역 관계와 세계 공동으로 대처해야 할 문제에서 그렇다."라고
1936년 이병철은 드디어 마산 북쪽 북마산에 ‘협동정미소’를 연다. 마산은 한국 경상남도에 위치한 도시다. 지금은 창원시에 통합됐다. 협동정미소가 문을 연 그 시점, 이병철 그의 나이 갓 26세 때다. 두 명의 주주를 확보해 3만원으로 시작했지만, 마산 제일의 정비소를 만들기에는 자금이 부족했다. 이병철은자금 확보를 위해 은행의 지원을 받기로 한다. 지금 한국의 산업은행의 전신인 식산(殖産)은행 마산지점 히라타(平田) 지점장과 면담을 했다. 본래 이병철은 담보도 충분하고 사업계획도 탄탄해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문제 없이 대출을 받았지만, 그 절차는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이병철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지점장은여러 가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곡물가격 변동 원인은 무엇인가? 일본 곡물시장 동향을 어떻게 보는가? 비록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일개 정미업자로서는 알 필요도 없는 질문이 집요하게 계속됐다. 테스트 받는 것 같아 몹시 불쾌했으나 꾹 참고 성실하게 답했다. … 지점장이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조사해서 조건만 닿으면 융자해드리겠습니다’고 말했다. 드디어협동정미소의 기계가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리 호락
노비 해방의 훈훈한 기억 ‘사업을 하자.’ 이병철의 결심은 이렇게 오랜 방황 끝에 온 것이다. 이병철은 사업에 대단한 성공을 해 오늘의 ‘삼성그룹’을 만들었다. 훗날 이병철은 자서전에서 돌이켜보면 “그 성공이 바로 오랜 방황 때문”이라고 회고한다. 방황은 시간의 낭비가 아니라 새로운 전진을 위한 동력이 된다는 의미다. 참 범인으로서는 생각하기 힘든 논리다. 사업을 하기로 한 순간 이병철은 이미 남다른 생각, 남다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엇이 이병철을 이렇게 남다르게 만들었을까? 앞서 이병철의 남다른 면을 이야기 한 적이 있다. 이병철은 절대 자질이 남다른 이가 아니었다. 이병철의 표현을 빌면, “너무 일반적이었다”고 스스로의 자질을 평했다. 그럼 무엇이 이병철을 비범하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바로 스스로가 스스로의 인생을 결정했다는 것이다. 이병철은 하고 싶은 것을 찾아하고, 하면 열심히 했다. 초등학교 서울유학, 초등학교 중퇴와 중학교 속성과정 이수, 역시 중퇴하고 선택한 일본 유학 길을 택한다. 일반적 시각에서 보면, 이병철은 뭐든 중도이폐한 것일 수 있다. 사실 이병철을 이해하고 나면 다른 것이 있음을 알게 된다. 중도 하차가 아니
“졸업장 하나 없다.” 이병철이 스스로 자서전에서 고백한 내용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을 포기하면서 이병철은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다니기만 했지 졸업하지 못해 졸업장 하나 없었다. 오랜 감기로 몸이 허약해졌다는 게 대학 중퇴의 이유였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 정말 그냥 공부가 하기 싫었다고 하는 것 이상으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였다. 잠시 일본 곳곳을 유람하며 방황한다. 그러다 이병철은 돌연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가방을 싸들고 한국행 연락선에 몸을 싣는다. “너도 생각이 있겠지. 요양이나 잘 해라.” 이병철의 부친은 그렇게 아들의 귀향을 반긴다. 혼날 줄 알았던 이병철에게는 뜻밖의 일이었다. 고향산천의 공기와 물은 역시 좋았다. 일본에서 그렇게 이병철을 괴롭히던 감기는 씻은 듯 사라졌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편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편안함 때문이었을까? 이병철의 뜻하지 않았던 방황이 시작된다. 일본 생활에서 돌아온 이병철은 물론 처음엔 다양한 시도를 해본다. 일본은 당시 아시아에서는 가장 발달한 나라였다. 산업화에 가장 성공했다. 산업 분야는 무엇이든 한국보다 수십년 앞선 상태였다. 철도나 기계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농업
스스로 인생을 가꾸는 장인 정신…오늘 삼성의 진정한 비밀 배안에서의 불쾌한 기억을 안고 도착한 일본은 생각보다 친절했다. 사실 아무리 식민지지만, 돈 많은 유학생이 박대 받을 이유는 없었다. 오늘의 이야기는 좀 엉뚱한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 ‘빌 게이츠’, ‘스티브 잡스’ 소위 세계 IT업계의 두 거봉이다. 우리의 주인공 ‘이병철’의 이야기 자료를 읽다 보면 이들과 묘한 공통점이 있다. 물론 연배는 이병철이 훨씬 앞선다. 무엇일까? 우선 빌과 스티브만 보면, 대학을 중퇴하고 싶었던 IT업계에 투신해 일가를 이뤘다. 이병철도 마찬가지다. 그는 사실 당대 웬만한 이들은 꿈도 꾸지 못하는 도쿄 유학을 했다. 그것도 아주 넉넉하고 행복하게 했다. 하지만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빌과 스티브처럼 졸업하지 않았다. 공통점이다. 하지만 더 정확한 공통점은 그게 아니다. 오직 앞서 언급한 것은 단순한 현상일 뿐이다. 그들이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이유, 그게 바로 정확한 이병철, 빌과 스티브의 공통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공통점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정확한 공통점, 그것은 바로 “하고 싶은 것을 위해 배웠고, 스스로 충분히 배웠다고 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