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관계 6개 업체에도 50여 억 환의 추징금이 징수됐다. 이병철은 간부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부의 무리한 요구가 있더라도 따르도록 하자. 해방 후 오늘 에 이르기까지 매점매석 귀속재산 불하 정치 권력과의 결탁으로 졸부가 된 사람도 있고, 은행 돈으로 손쉽게 사업가가 돼 기업은 파산 직전에 있으면서도 애국적인 기업가 연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그런 횡재 기업과는 달리 경제성과 경쟁력을 근간으로 하여 기업을 일으키고 운영하여 왔다. 지금과 같은 혼란 소겡서 쉽게 동요함으로써, 우리가 지켜온 큰 것까지 잃게 된다면 국가를 위하는 길이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병철은 비료공장의 꿈을 접지 않았다. 이미 차관도 얻어놓은 상황이었다. 정부만 적극 나선다면 바로 진행될 일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치판은 경제가 문제가 아니었다. 백성의 분노의 근원은 빈곤에 있었지만, 정작 정치인들은 그에 대한 정답인 ‘경제 살리기’ 보다 당쟁에 몰두한다. 권력을 잡는 것만이 정치인들의 관심사였다. 백성들의 분노는 그런 정치인들에게는 정치력 성장의 동력으로만 보일 뿐이었다. “분노하라, 나는 더욱 권력을 잡는다.” 바로 당시 한국 정치권의 생각이었다.
‘아직도 전시행정을 위해 세수의 증대만을 꾀했던 1950년대의 세제가 그대로 답습되고 있다. 법인세, 사업소득세, 물품세 등 그 세법 체계자체에 기본적인 모순이 있는데, 영업세나 부과 제세까지 부가되므로 그것을 모두 합치면 결국 세율이 수익의 120%에 이르게 된다. 이 모순을 정부도 알고 있어기에 세법개정안이 국회에 제출되었던 것으로 안다. 많은 기업이 탈세를 했다고 하지만 근원적인 문제는 다른 데 있다. 기업을 존속시키는 것이 국가를 위한 일이라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불합리한 세제는 덮어 두고 그에 희생되었던 기업만 부정축재로 몰아 단죄하는 것은 사리에 어긋난다. 처벌에 앞서 세제를 개정하는 것이 일의 순서일 줄 안다.’잇달아 부장검사는 탈세한다는 것을 사장도 알고 있었느냐고 물었다. 사장 모르게 어떻게 임직원들이 임의로 탌헤 같은 것을 할 수 있겠는가고 말했다. 삼성은 그 조사로 추징금 200억 환을 통고 받는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달러에 불과했다. 당시 1달러는 63환 정도였다. 3780환이 당시 한국민의 1인당 소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200억 환이라니 정말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그 뿐이 아니었다.
이병철의 분석은 정확했다. 한국사회는 갈수록 혼란에 빠졌고, 정부는 민심의 분노를 가진 자들에게 돌렸다. 세무조사를 통한 세수 확대, 바로 당시 정부가 취한 행동이었다. 삼성도 걸렸다. 탈세액이 적지 않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탈세에 대한 이병철의 생각이었다. 삼성 산하 15개 전 기업체가 조사를 받을 때다. “검찰에 출두하였다. 물론 팽생 처음이다. 부장 검사실에 들었더니 젊은 검사와 서기 등 10여 명이 호기심에서인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부장 검사의 심문이 시작됐다. 먼저 ‘그동안 탈세로 모은 재산이 얼마나 되느냐?’고 물었다. ‘아직 자세히 계산해 보지를 못했다’고 대답했다. 솔직한 대답이었지만 듣기에 따라서 이상했는지 모른다. 부장 검사를 말을 바꿔 이번에는 ‘왜 탈세를 했느냐?’고 물었다.
한국비료와 이병철의 10년의 고난.-2 1. 4.19혁명이후 혼란한 한국 “우리 사회의 혼란상은 형언을 절하는 것이었다.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지는 나날이 계속 되었다. 세상은 온통 데모병에 걸려 사회질서를 지키는 파수꾼인 경찰관마저 데모에 나서는 판국이었다.” 1960년 4.19 직후 한국 사회에 대한 이병철의 묘사다. 읽으면 읽을수록 당시 한국 사회가 왜 발전이 더디었는지 알게된다. “일부 정치인과 학생들이 판문점에서 남북대좌를 하자고 들고 나오고, 이에 동조하거나 이를 방조하는 정치세력이 점차 정계 일각에서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는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할 뿐이다.”이런 상황에서 경제활동이 이뤄질 리 없다. 이병철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사회 혼란의 근인은 빈곤에 있는데 경제활동의 마비로 그 빈곤이 더욱 심화되고, 그 것은 사회불안을 더욱 확대시켜 간다.”
문제는 당시 이런 공장을 짓는 4000만~5000만 달러 정도가 든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금액이었다.이병철은 아무리 고민해도 이돈을 마련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병철은 마음도 정리할 겸해서 1959년 늦가을 일본을 찾는다. 사실 이 때부터 이병철은 매년 겨울을 일본에서 지내는 습관이 생긴다. 소위 이병철의 ‘도쿄구상’이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다양한 분야에 경제 전문가들을 만나고, 국제사회 주요 정보도 얻으면서 사업을 구상하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 처음이 바로 1599년 늦가을의 일본 방문이었다. 당시 이병철은 미국을 들러 일본 도쿄에 들려 새해를 맞는다. 1960년 두 번째 일본행에서 이병철은 비료공장 자금의 해법을 찾는다. 호텔에서 본 경제대담 프로가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1960년 1월1일 새해를 도쿄 제국호텔에서 보내고 있을 때였다. TV에서 경제, 사회, 군사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와 대화를 나눴다. 군사문제에서는 핵무기가 사용될 것인가의 여부에 화제가 모아졌고, 경제 문제에서는 미소간의 경쟁, 과연 소련의 경제가 미국 경제를 능가할 수 있나 없나는 것이 토론의 중심이었다.
한국비료와 이병철의 10년의 고난. 한국비료, 한국 산업에도 그렇지만, 이병철에게도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사업이다. 얼마나 이병철에게 의미가 있는지, 한국비료 이야기를 하면서 이병철의 첫마디를 들어보면 잘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비료공장을 한국비료라는 이름으로 울산에 완성시키는 데는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한국비료에 대한 이병철의 술회다. 10년의 고난, 바로 한국 현대사의 급변과 맞물린 것이다. 계속 이병철의 이야기다.“1.19혁명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붕괴, 장면(張勉) 정권하에서의 정치, 사회의 혼란은 5.16 군사혁명으로 이어진다. 이나라의 역사는 걷잡을 수 없는 격랑 속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부정축재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세금 추징이라는 명목의 재산몰수도 경험했다. 실의와 재가에서의 갈등, 이 10년은 바늘방석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이야기는 이병철의 이 10년간의 이야기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국 사회는 급속히 안정을 찾았지만, 경제는 여전히 미국 원조에 의존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원조가 영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병철은 수입대체 상품으로 제당과 모직 사업을 벌여, 값비싼 외제 상품을
‘돈병철’(錢鬼), 고 이병철 삼성명예회장에게 붙었던 별명이다. 한국에서 돈을 가장 많다는 의미이기도 했지만, 돈만 안다는 폄하의 뜻도 있다. 돈이 많다? 사실이었다.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성공으로 이병철은 스스로 고백했듯 한국에서 젖먹이 어린이만 빼고 모두가 다 아는 이름이 됐다. 당시 한국 세금의 4%를 이병철과 그의 회사가 냈다. 당시 한국이 아무리 못살아도 한 나라의 경제 세수의 4%를 한 사람과 한 기업이 책임진다는 게 결코 적은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뿐이 아니었다. 돈 병철이란 별명을 또 다른 계기가 있었다. 이병철은 한국 모든 시중은행의 대주주였던 적이 있었다. 은행이란 곳이 어떤 곳인가? 돈을 맡기고 관리하는 기구다. 이런 기구의 전부가 삼성 이병철 회장의 소유였던 적이 있다니? 무슨 사연일까? 1956년 직후의 일이다. 당시 한국전쟁도 마무리돼 한국 경제가 안정을 찾기 시작할 때였다. 앞에서도 여러차례 설명했지만, 일본이 패망을 해 한국이 독립한 뒤 이어 한국전쟁까지 한국 경제는 혼란 그 자체였다. 인플레이션이 극심해 하루에 자고나면 물건 값이 배로 뛸 정도였다. 전쟁으로 물자가 귀해지면서 인플레이션은 더욱 심했다. 그런 현
한국인에 의한 가장 한국적인 ‘정원공장’, 제일모직 여러 우여곡절 끝에 제일모직 공장 건축은 시작됐다. 이병철의 결심은 확고했다. ‘우리 손으로 하자. 비록 수입제 기계를 쓴다고 해도 다른 모든 것은 우리 손으로 하자.’ 자연스럽게 이병철의 철학이 공장에 녹아들었다. 어쩔 수 없이 자주 현장을 방문해 공장 하나하나 ‘왜 그렇게 지어야 하는지’를 직접 설명해야 했다. 이병철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기술자를 비롯한 건설 요원들에게 우리가 왜 모직 공장을 지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우리 자신의 손으로 완성한 공장이 혹시라도 잘못된 데가 있을 경우에는 우리나라 기술자의 체면은 땅에 떨어진다고 독려를 했다. 각 부문의 기술 책임자에게는 기술 문제는 전폭적으로 일임한다고 당부하면서, 모직공장에 거의 나의 꿈과 이상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모직공장이긴 하지만 결코 국제 수준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거듭 당부하기도 했다. 그랬다. 제일모직 공장은 경영자 이병철의 이상과 꿈이 담긴 곳이었다. 대표적인 곳이 여성 기숙사였다. 공장이 가동되면 1000명이 넘는 젊은 여성들이 숙식을 해결하며 일을 해야 했다. 역시 이병철의 고백이다. “
“쉬운 일은 없다. 다 어렵다. 다만 그래서 모든 일이 보람이 있다.” 이병철의 성공담이 주는 교훈이다. 참 누가 봐도 대단한 성공이 바로 이병철의 삼성이다. 이 글을 쓰는 2018년 9월 삼성은 이미 한국을 넘어섰다. 한국의 기업이 아니라 세계의 기업, 세계인이 함께 관심을 쏟는 그런 기업이 됐다. 이렇게 지금 돌이켜보면 모두가 경탄하는 이병철의 성공이다. 하지만 그 성공의 길이 처음부터 모든 사람의 박수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이 글을 읽은 독자들은 잘 안다. 이병철이 사업을 구상해 대부분의 경우 처음부터 반대에 부딪쳤다. 양조장 사업이 그랬고, 전후 세운 삼성물산이 그랬다. 제일제당은 삼성 내부는 물론 외부에서도 조차 실행에 반대를 했다. 제일모직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제당 성공에 취해 너무 무모해졌다”고 손가락질을 했다. 그러고 막상 시작하려니, 정부 차원에서 간섭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병철이 당초 추진하려던 일본 모직 제조기를 놔두고 독일제를 쓰라고 압박을 해대기 시작했다. ‘참 그럴거면 처음부터 반대를 하지 말던지...’ 그래도 이병철은 한번 결심한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종국에는 성공의 결실을 만들어 냈다.
제일제당의 탄생 대구의 조선양조장이 마련한 3억 원은 이병철에게는 기사회생의 활로였다. 이병철은 1951년 1월 10일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세운다. 서울의 과거 삼성물산 이름을 따왔지만, 이름만 같을 뿐 속내는 완전히 새로운 회사였다. 이병철의 증언이다. 삼성물산의 재산은 이미 오유烏有로 돌아갔으므로, 부산에서의 삼성 재건은 그야말로 무에서 다시 출범한 것이다."물론 여기에는 과거 공신들이 적지 않이 합류했다. 본래 서울에서 신생사를 1년만에 당대 1,2위 무역상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만들었던 맹장들이었다. 부산의 삼성물산은 날개를 단 듯 성장했다. 설립 1년후에는 결산에서 3억 원의 출자금이 그 20배인 60억 원으로 불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성장도 이병철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전쟁의 황량한 조국을 보면서 현지에 거의 모든 생필품을 수입해 조달해 돈을 버는 자신의 처지가 오히려 곱게보지만 않았던 것이다."무역업이 당시 한국의 국가적 급선무였던 것은 오늘과 다를 바 없었다. 특히 당시는 극도의 물자부족 시대였던 만큼, 수입이야말로 시급하고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 이병철의 생각은 여기서 멈췄다. '우리 국민이 필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