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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星集团的始点——湖岩李秉喆(12) 될 일은 반드시 된다.

  1936년 이병철은 드디어 마산 북쪽 북마산에 ‘협동정미소’를 연다. 마산은 한국 경상남도에 위치한 도시다. 지금은 창원시에 통합됐다. 협동정미소가 문을 연 그 시점, 이병철 그의 나이 갓 26세 때다. 두 명의 주주를 확보해 3만원으로 시작했지만, 마산 제일의 정비소를 만들기에는 자금이 부족했다.

 

  이병철은 자금 확보를 위해 은행의 지원을 받기로 한다. 지금 한국의 산업은행의 전신인 식산(殖産)은행 마산지점 히라타(平田) 지점장과 면담을 했다. 본래 이병철은 담보도 충분하고 사업계획도 탄탄해 문제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문제 없이 대출을 받았지만, 그 절차는 생각처럼 쉽지는 않았다. 이병철은 당시를 이렇게 기억했다.

 

 

지점장은 여러 가지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곡물가격 변동 원인은 무엇인가? 일본 곡물시장 동향을 어떻게 보는가? 비록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일개 정미업자로서는 알 필요도 없는 질문이 집요하게 계속됐다. 테스트 받는 것 같아 몹시 불쾌했으나 꾹 참고 성실하게 답했다. … 지점장이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조사해서 조건만 닿으면 융자해드리겠습니다’고 말했다.

 

 드디어 협동정미소의 기계가 돌아가게 것이다. 그러나 세상일이 그리 호락호락한 것만 아니었다. 무엇보다 시절이 수상했다.

 

 

  1936년 일본이 대륙을 침공한 지 4년째가 되는 해였다. 일본은 세계 공황의 여파로 파탄에 이른 경제의 해결 실마리를 대륙침공을 통해 찾고자 했다. 전쟁이 격화되면서 물자가 급격히 부족하게 됐고, 일본은 군비 조달을 위해 조선을 점차 병참기지로 만들었다.

 

 

  쌀은 가장 타격을 입은 생필품이다. 일본은 1910년 조선을 병합한 뒤 조선의 식민지적 토지 소유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토지조사를 벌였다. 1928년 이 조사 작업을 완수하는데, 이 순간 한국의 수많은 토지들이 조선 총독부의 소유로 둔갑한다.

 

 

  1930년 통계에 따르면 총독부 소유의 농경지와 임야의 면적은 전 국토의 40%에 해당했다. 총독부는 이 땅들을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비롯한 일본토지회사와 일본인들에게 무상 또는 염가로 파격적으로 불하했다.

 

 

  이런 어수선한 상태에서 시작한 이병철의 협동정미소는 예상과 달리 적자를 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적자는 자본금의 3분의 2에 달했다. 투자자 가운데 한 명은 회사 해산을 요청했다. 이병철은 상황을 개선해보고 안되면 해산하자고 했다. 해산을 요청한 주주의 돈은 해산을 하는 경우도 이자 없이 1만원을 돌려주고, 이익이 나면 이자를 쳐서 주기로 했다.

 

 

  이병철을 분석을 통해 문제가 쌀의 구입 방법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쌀 값의 변동을 잘 모르면서 남들이 사기 시작해 값이 오르면 따라서 사고, 남들이 팔기 시작해 가격이 떨어지면 급히 팔아 문제가 됐던 것이다.

 

 

  이병철은 당장 구매 패턴을 바꾸었다. 쌀값이 내려가면 쌀을 , 쌀값이 올라가면 쌀을 팔기 시작했다. 정미소의 현황은 이미 이병철이 정확히 알고 있었다. 도정을 하는 데는 이미 수익구조가 확실했다. 이병철의 분석대로 쌀 구매 패턴을 바꾸자, 당장 수익이 나기 시작했다. 한  2만원을 까먹었는데, 그 다음해는 까먹은 돈의 배를 벌었다. 3만원의 자본금을 놓고도 2만원의 수익이 났다. 이병철은 해산을 요구한 주주에게 돈과 이자를 주고 다음해 사업을 더욱 탄탄히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병철의 눈에 들어온 것이 운수회사였다. 당시 트럭 한 대는 비행기 값이었다. 하지만 이병철은 수익이 확실한 사업에 투자하는 것은 주저하지 않았다.

 

 

  마침 일본인이 운영하던 마산 ‘일출(日出)자동차 회사’가 매물로 나왔다. 이병철은 이 회사를 인수한 뒤 다시 트럭 10대를 추가해 운수회사를 직접 경영하기 시작했다. 이병철의 예상은 적중했다. 스스로 거래하는 쌀들은 물론이고, 마산 일대 운수는 이병철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한국에 ‘돈이 굴러 들어온다’는 표현이 있다. 사업이 궤도에 올라 자동적으로 일정 수익을 내고 심지어 수익이 점점 커지는 상황을 이야기 한다.

 

 

  수익이 늘자 이병철은 사업을 전문 경영인에게 맡기고 유곽 출입을 시작했다. 술을 좋아했던 것은 아니지만 음악과 풍류를 좋아했다. 사실 돈이야 사업 구조에 맞춰 쏟아져 나오고 있었고, 이병철이 할 일도 딱히 없었다.

 

 

  이미 이병철은 마산 제일을 넘어, 경상남도 제일, 심지어 조선 제일의 부자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는 유곽에 가면 그 명성에 걸맞게 정말 큰 판을 벌이고 놀았다. 한 집의 기생들은 물론이고, 이웃집 기생들까지 모두 불러 모아 놀았다.

 

 

  이런 일화도 있다. 하루는 그가 술집에 술을 마실 때 지역 일본 경찰 간부가 와 회식을 했다. 와서 보니 기생이라는 기생은 모두 이병철이 약해 데리고 놀고 있었다. 경찰 간부의 부하가 와서 청했다. “그러지 말고 기생을 몇 보내주시오.”

 

 

  그런데  말이 그리 공손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실 당시 이미 조선이 일본의 치하에 들어간 지 40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이다. 일본 공무원, 그것도 서슬 시퍼런 경찰 간부가 아무리 조선인 부자라고 해도 눈에 들어왔을까? 그런데 이병철 역시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사실 그가 일본에 공손했으면 와세다 대학 출신으로 진작에 조선 총독부에서 한자리 했을 것이다.

 

 

  “아 그러지 못하겠으니 마음대로 하라고 하시오.” 한마디로 거절을 한다. 이병철은 이 한마디로 여러 곤란한 문제에 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병철 자서전 어디에도 후회했다는 표현은 없다. 단지 유곽에 다니면서 한국 전통 음악을 사랑하게 됐고, 이는 훗날 삼성그룹을 일군 뒤 한국 국악 발전에 공헌하는 일을 하게 됐고, 이제 스스로 자부심을 가진다고 고백하고 있다.

 

 

  참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순간이 바로 마산 협동정미소와 운수업을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이병철은 그런 것에 만족하고 주저 앉는 스타일이 아니다. 돈에 대해 왜 그가 한국 아니, 아시아는 물론이고 세계에서도 최고 수준으로 손꼽히는지 아직도 알아야할 게 많다.

 

-사진 : 삼성그룹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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