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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의 시작 —— 호암 이병철(19)

 

 

 

고난 속에 깨달은 나라와 경제의 중요성

한국 전쟁은 이병철에 무슨 의미였을까? 당연히 첫 감성은 혼란과 어려움이었을 것이다. 적군의 탱크가 시내에 진입을 하고 총칼을 든 병사들이 이전 정권하에 잘 먹고 잘 살던 사람들을 잡으러 다닌다. 이병철은 당대 서울에서 가장 잘 사는 사람 중 하나였다. 당연히 불안하고 두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이 전부였을까? 그가 말년에 쓴 자서전에 따르면 꼭 그렇지는 않았다. 우선 정부에 대한 실망, 사업을 하며 돈을 벌어온 그동안 자신의 생의 모든 것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공산체제에 대한 분노, 나라 수호에 대해 절실함 등등이 그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글 속에 그대로 묻어나 있다.
 

 

우선 불안과 두려움이다. 그의 자서전에는 북한군이 서울을 함락하기 전날 밤의 표정이 이렇게 기록이 돼 있다.
 

 

“불퇴전不退轉의 결의로 서울에 이주하여 동분서주하면서 무역업을 겨우 궤도에 올려놓은 무렵이었다. 기업 경영을 다소 알게 되고, 개인적인 축재에서 벗어나 국에 기여할 수 있는 기업 활동의 참 뜻과 기쁨을 되새기고 다짐하면서, 포부에 부풀어 있던 바로 그 때 동란의 발발은 충격적이었다.
 

 

‘사업은 어떻게 되나, 그 보다 생명은….
 

 

정오를 지나면서 저녁까지 줄을 이어 병사들을 가득 태운 트럭들이 북쪽을 향해 서울 시가를 쉴 새 없이 달려갔다. 시민들은 연도에서 승리와 무운을 빌면서 이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국방부 발표는 아군이 적을 격퇴 중이니 시민은 안심하라는 것이었나, 아군이 불리의 양상으로 변해갔다. 이틀 후인 27일 저녁의 라디오 뉴스는 수원을 임시 수도로 한다는 정부 발표를 보도했다. 포격이 귓전에 울리기 시작했고 남하하는 난민이 한꺼번에 거리를 메웠다.

 

 

 

 

 회사 간부들과 대응책을 의논해 봤지만 별다른 묘안이 있을 수 없었다. 시가전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안전을 위해서 각자가 회사를 중심으로 해서 서로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연락하기로 했다.  그날 밤, 갑자기 날카로운 사이렌 소리가 무거운 정적을 깨뜨렸다. 휴전 신호일까, 아니면 무슨 군사 신호일까. 이것저것 골똘히 생각하고 있는 사이에 포성이 멎었다. 밖에 나가 상황을 살피고 싶은 충동도 느꼈지만, 바깥은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칠흑같은 암흑이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표현은 절제됐지만, 칠흑같은 밤을 가득 채웠던 포성이 갑자기 멎고 그 자리를 두려움이 가득 채운 두려움이 여실히 살아있다. 한 밤의 갑작스러운 침묵…. 본래 지극한 음은 소리가 없다고 했다. 말보다 침묵이 더 많은 것을 이야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두려운 밤이 지나고, 날이 밝는다. 이제 막연한 두려움의 실체가 드러나고 본격적인 불안이 시작된다.

 

“가족과 함께 꼬박 뜬눈으로 밤ㅇ르 새운 다음날 28일 새벽, 땅이 흔들리는 듯 요란한 소리가 정적을 깨트렸다. 낯선 전차의 포탑에 적기가 나부끼고 있는 것 아닌가. 공산국이 입성한 것이다.
대부분의 서울 시민이 다 그랬듯이 나도 정부 발표만 믿고 있다가 서울을 서둘러 벗어나지 못하고 만 것이다. 북한이 남침을 개시한 지 불과 나흘, 천하는 완전히 일변하고 말았다. 망연자실한 나는 두문불출했다.

 

 다음날이 29일 인민위원회에서 왔다는 자를 필두로 하여, 내무서 등 여러 기관이라고 하면서 번갈아 드나들며 재산과 사상에 관한 신문 조사를 했다. 큰 집에 살고 있어 주목받으리라 생각했지만, 그들에게 해를 당해야 할 특별한 이유는 없다고 마음을 달래고 하였다.
서울이 공산군에 유린된 지 2주일쯤 지난 7월 10일경의 일이라고 기억한다. 집에서 가까운 혜화동 로터리를 낯익은 승용차가 달리고 있었다. 자세히 보니 나의 자동차, 미국제 신형 시보레였다. 
동란 이틀 전인 6월 23일 주한 미국 공사로부터 사들여 등록을 갓 마친 것이었다. 뒷자리에 버젓이 타고 있던 사람은 한 때 남로당 위원장을 지내다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전후하여 월북했다고 알려진 박헌영朴憲永이었다. 그때 나의 분한 마음은 이루 다 표현할 길이 없었다. 
공산치하에서 공산당의 온갖 약탈과 만행을 목격했고, 자유라곤 한 줌도 없는 암흑의 세계를 사무치게 경험했다.“
 

 

 

그랬다. 이병철에게 조국이라는 개념은 남다른 것이엇다. 본래 없었던 것이다. 이병철은 일제 식민시절 태어났고, 어느 일본인 보다 부유한 일본인으로 자랐다. 그래서 더욱 진짜 일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다. 능력이 있어도 차별받는다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기게 조국이다. 일본의 패전으로 솔직히 어느 날 갑자기 생겼다. 당대를 산 모두가 그 조국이 얼마나 소중한지 모르고, 새로 생긴 조국에서 자신의 이익만 챙겼다. 그 틈을 북이 노리고 일으킨 것이 한국전쟁이었다. 다시 조국이 사라졌다. 기존의 가치들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린 것이다. 이병철을 비롯한 많은 당대 사람들이 비로소 조국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된 것이다. 이병철의 이 같은 경험, 아니 당대 초기 한국 기업가들의 이 같은 경험은 ‘사업보국’, 사업을 해 조국을 위한다는 한국 기업의 독특한 이상을 만들어 내는 기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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