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삼성그룹의 시작 - 호암 이병철(20)

다시 무에서 시작

 

제일제당 공장 착공 후 기념 촬영을 하고 있는 호암 (1953) ⓒ삼성그룹

'한국전쟁’으로 삼성물산공사는 무로 돌아가 버렸다. 인천과 용산의 보세 창고에 보관돼 있던 손질 상품도 깨끗이 없어졌다. 용산 창고의 것은 공산군이 약취해 갔고, 인천 창고의 것은 공산군이 미처 약취하기 전에 국군이 서울을 탈환했을 때 혼란의 틈을 타서 한국의 어느 유력자가 가로채 착복했던 것으로 파악됐다.
전쟁은 이렇게 세상을 도적의 것으로 만들었다. 적도 아군도 전쟁의 극한에서는 모두 도적이 됐다. 
초반 전세는 절대적으로 남한에 불리했다. 서울을 점령한 공산군은 한강을 건너 파죽지세로 남하했다. 6월 25일 침략을 시작해 8월에는 이미 대전 남쪽까지 밀고 내려갔을 정도다.


그러다 9월 15일 인천상륙이 성공하고, 28일에는 서울이 수복된다. 
서울 수복과 함께 확인된 것은 삼성물산공사의 모든 것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특히 인천 창고의 물건을 되찾기 위해 삼성 간부들이 나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서울이 다시 북의 손에 넘어가면서 재판은 한번도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

 

 


이병철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1년 남짓한 짧은 동안에 기존 대회사와 비견할 만큼 천신만고 끝에 키워 놓은 삼성물산공사였다. 그것이 일조에 무산되다니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러나 이병철의 실망은 여기 끝나지 않았다. 그의 자서전에는 “그(삼성물산공사가 물거품이 된 것)보다 더 실망을 금할 수 없었던 일이 있었다. 바로 한국군이 서울 부역자 색출에 나선 것이다. 이병철은 이렇게 토로했다.
“부득이한 긴급사태였다고는 하나, 말하자면 정부는 국민을 버리고 도망한 격인데, 그러한 정부가 피란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시민을 잔류파라 하여 죄인시 하는 것이었다. 정부의 떳떳하지 못한 성루 포기 때문에 미처 피란갈 수가 없었던 각계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고초를 겪고 희생되었던가. 정부란 과연 무엇인가를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병철의 결론은 무엇이었을까? 필요할 때 언제는 백성을 버리고, 그 잘못을 도리어 뒤짚어 씌우기 위해 백성을 부역자로 모는 정부를 보면서 이병철은 무엇을 생각했을까?
 

 

아쉽게도 그의 자서전에는 그 생각이 나오지 않는다. 아무래도 정부의 영향을 계속 받는 삼성에게 그의 생각 고백은 부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리라. 실제 삼성은 그 뒤에서 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정권의 견제를 받아야 했다. 2018년 현재 한국 문재인 정권은 재벌 개혁을 주창하고 있는데, 바로 삼성이 그 최대 목표다.
다시 한국 전쟁 당시 서울로 돌아가자. 이병철은 당시 서울 시민들의 분위기에 대해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서울에 잔류했던 시민은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던 공산치하에서 국가와 정부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인식했으므로, 순수한 애국심에 꽉 차 있었다. 온 국민이 일치단결할 수 있는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였던 것이다.

 

 

이병철은 다시 서울이 북에 넘어갈 조짐을 보이자 트럭 5대를 구해 사원 가족들과 함께 피난을 한다. 당시 트럭 한 대 임대료는 무려 200만 원이었다. 약취 당하고 남은 삼성물산 전재산을 처분해 트럭을 구했다. 1950년 12월 초순이었다.

 


대구로 향하는 길이었다. 대구에는 그가 서울로 가기 전에 양조장 사업 등을 벌였던 곳이다. 서울로 떠나며 전 사업을 현지 직원들에게 맡겨놓았던 상태였다.
대구로 가는 길을 편치 않았다. 트럭을 타고 갔지만, 길마다 피난민이 가득했다. 군용 트럭이 오면 가던 길을 양보해야 했다. 겨우 그렇게 조심 조심해 꼬박 사흘을 달려 대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구에는 뜻밖의 기쁜 소식이 이병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병철의 기록으로 무슨 일인지 보자.

 


“나는 바로 조선양조장을 찾았다. 사장 김재소, 지배인 이창업, 공장장 김재명씨를 만나 신세를 지게 되었다고 부탁을 했다. 그러나 그 부탁에 대한 그들이 대답에 나는 깜짝 놀랐다. 
“사장님,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3억 원 가량 비축이 있습니다. 이것으로 하시고 싶은 사업을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뜻밖의 구원이었다.” 


정말 뜻밖의 일이었다. 이제 새로운 시작이 가능해진 것이다.​

 

 

 

 

  


사회

더보기
석탄도시에서 친환경 관광도시로, 산시 다퉁의 성공적 변화에 글로벌 이목 쏠려
석탄도시로 유명했던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이 경제 관광 도시로 변신에 성공해 중국에서 화제다. 탄광 도시의 생존은 한국을 비롯한 각국의 주요 현안 가운데 하나다. 석탄이 주 연료이던 시절 번화했지만, 에너지원의 변화와 함께 석탄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고, 그 석탄 생산에 의존해 만들어졌던 몇몇 도시들이 생존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한국은 도박산업을 주면서 관광도시로 변모시켰다. 중국에서는 이런 정책 지원 없이 친환경 도시로 변화로 관광 도시로 변화에 성공한 곳이 있어 주목된다. 주인공은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이다. 중국 산시성 다퉁이 과거 ‘석탄 도시’의 이미지를 벗고 친환경 관광지로 변모하고 있다. 한때 전국 최악의 대기질 도시 중 하나로 꼽혔지만 최근에는 ‘다퉁 블루(大同藍)’라는 별칭과 함께 주요 관광 도시로 선정됐다. 다퉁은 오랫동안 석탄 산업에 의존해 왔지만 환경 오염 문제로 큰 타격을 입었다. 2000년대 초반에는 전국 대기질 순위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이후 당국은 불법 탄광을 정리하고 대형 탄광에는 자동화 설비를 도입해 분진 배출을 크게 줄였다. 일부 광산은 ‘석탄이 보이지 않는 밀폐형 관리’를 도입해 관리 수준을 높였다. 환경

문화

더보기
[영 베이징] '관광+ 문화' 융합 속에 베이징 곳곳이 반로환동 변신 1.
‘문화유적 속에 열리는 여름 팝음악 콘서트, 젊음이 넘치는 거리마다 즐비한 먹거리와 쇼핑 코너들’ 바로 베이징 시청취와 둥청취의 모습이다. 유적과 새로운 문화활동이 어울리면서 이 두 지역에는 새로운 상권이 형성됐다. 바로 관광과 문화 융합의 결과라는 게 베이징시 당국의 판단이다. 중국 매체들 역시 시의 놀라운 변화를 새롭게 조망하고 나섰다. 베이징완바오 등 중국 매체들은 앞다퉈 두 지역을 찾아 르뽀를 쓰고 있다. “평일에도 베이징 시청구 중해 다지항과 동성구의 룽푸스(隆福寺) 상권은 많은 방문객을 불러모았다. 다지항의 문화재 보호와 재생, 룽푸스의 노포 브랜드 혁신이 시민과 관광객에게 새로운 소비 경험을 제공했다. 그뿐 아니라, 올여름 열풍을 일으킨 콘서트가 여러 지역의 문화·상업·관광 소비를 크게 끌어올렸다.” 베이징완바오 기사의 한 대목이다. 실제 중국 각 지역이 문화 관광 융합을 통해 ‘환골탈퇴’의 변신을 하고 있다. 베이징시 문화관광국 자원개발처장 장징은 올해 상반기 베이징에서 ‘공연+관광’의 파급 효과가 뚜렷했다고 밝혔다. 시에 따르면 대형 공연은 102회 열렸고, 매출은 15억 위안(약 2,934억 6,000만 원)에 달해 전년 동기 대비 각각 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