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크고 많고 강하고, 영원히 빛나라
이병철은 그렇게 새로 시작을 한다. 대구 수성시장 인근의 250평 남짓한 사무실을 빌려 삼성상회를 설립한다. 작지만 그래도 소위 무역회사였다. 건어물 같은 식품 등 생필품을 주로 교역하는 회사였다. 2개월간의 대륙 여행을 통해 선택한 것이었다.
이병철은 무역업을 선택한 이유에 대해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혔다.
“조사 여행 결과 청과물과 건어물과 잡화 등의 무역이 적합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일상생활에 불가결한 것이므로 소비도 늘어날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들의 무역을 담당하는 전문가는 없었다.”
당대는 일본이 중국 침략을 시작하면서 생필품이 품귀현상이 극심하던 시기였다. 이병철은 사업 성공의 기본으로 3가지를 꼽았다. 정확히 시대의 변화를 읽을 것, 풍부한 자본을 가질 것, 좋은 인재를 확보할 것 등이다.
이병철의 사업 판단 기준은 단순하지만 정확했다. 본래 사업이란 단순하면서도 비전이 명쾌해야 성공하는 법이다. 바로 오늘날 삼성 성공의 최대 비결인 셈이다.
그리고 이병철은 사업 목표로 역시 세 가지를 꼽았다. 크고, 강하고 많아야 한다. 이병철의 그의 자서전에서 삼성의 ‘삼’은 이 세 가지를 의미한다고 밝혔다. ‘성’은 별처럼 영원히 빛난다는 의미라고 했다. 크고 많고 강해서 빛나는 기업, 그것이 삼성의 의미였고, 이병철의 모든 사업의 목표였다.
사실 지금의 삼성이 그대로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싶다. 현재 삼성은 아시아를 넘어 세계에서 가장 강하고, 크고, 풍성한 전자회사다. 그것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그 삼성이 대구에 첫 뿌리를 내린 것이었다. 삼성상회의 자본금은 3만 원이었다. 1938년 3월 1일 이병철의 나이 28세 때의 일이다.
삼성상회가 처음 무역을 시작한 물건은 대구 일대에서 생산되는 청과물과 포항의 건어물이었다. 이병철은 마산에서 첫 사업을 시작하면서 쌀을 구매할 때 시중 가격 변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가 크게 손해를 봤다. 이번에는 그 실패를 교훈으로 삼아 청과물의 가격 변동을 면밀히 살폈다.
결과적으로 삼성상회의 출발은 순조로웠다. 여기에 이병철이 성공 요인으로 꼽은 인재도 합류를 한다. 바로 그의 일본 와세다 대학 동창생인 이순근(李舜根)을 지배인으로 맞은 것이다. 이순근은 뛰어난 인재였지만, 대학시절 학생운동을 해 일본 정부의 감시를 받아 제대로 된 일자리를 구하지 못했던 차였다.
이병철은 모든 경영을 이순근에게 맡겼다. 물론 주변의 반대가 심했다. 조그만 신설회사의 경영을 벌써 남에게 맡긴다면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병철의 생각은 달랐다. 인재를 쓸 때 일을 맡기려면 과감히 모두 맡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의인물용 용인물의(疑人勿用 用人勿疑)’
이병철의 인재 철학이다. 이병철은 그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은행의 거액 융자나 대량의 자재구입과 수주 등 극히 일부의 중요한 문제들을 제외하고 어음 발행이나 인감의 관리 등에 이르기까지 경상적인 거의 모든 일을 이 씨에게 일임했다.
의심이 가거든 쓰지를 말고, 썼으면 의심하지를 말라. 의심하면서 사람을 부리면 그 사람의 장점을 살릴 수 없다. 그리고 고용된 사람도 결코 제 역량을 발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람을 채용할 때는 신중을 기하라. 그리고 채용했으면 대담하게 일을 맡겨라.
삼성상회의 출발과 함께 터득하고 실천했던 이 사람을 쓰는 원칙은 그 후 일관하여 나의 경영철학의 굵은 기둥의 하나가 되어 왔다.”
이병철의 판단은 또 한번 옳았다. 삼성상회는 이순근씨의 노력으로 조금씩 성과를 내더니 반석에 올라섰다.
이순근씨는 5~6년을 이병철과 함께 사업을 하다 월북을 한다. 북한의 사회주의적 이상 사회를 꿈꿨던 인물이다. 이병철 회고에 따르면 이순근은 북에서 한때 출세했으나 그 후 행적이 묘연해진 것으로 나온다. “이순근은 북에서 농림부 장관까지 지냈다는 소리도 있었지만 확실한 소리를 듣지는 못했다. 이상주의자로 남달리 정의감이 강한 사람이었으므로 북한의 현실에 결국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이병철의 생각이다. 글=청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