家荣,听说你跟你的女朋友分手了。... Jiā Róng,tīngshuō nǐ gēn nǐde nǚpéngyǒu fēnshǒu le. 찌아롱, 여자친구랑 헤어졌다면서요. 是啊! 我受不了她! Shì a! Wǒ shòubùliǎo tā! 네! 정말 못 견디겠어요! 怎么了? Zěnme le? 왜요? 我们吵架的时候,她总是“喊”我! Wǒmen chǎojià de shíhòu, tā zǒngshì“hǎn”wǒ! 우리가 싸울 때, 그녀는 항상 나를 불러요! *‘喊我’라는 표현은 ‘나를 부르다’라는 뜻이다. ‘喊’이라는 단어 자체에는 ‘소리지르다’라는 뜻이 있지만, ‘누군가에게 소리지르다’라는 표현은 ‘对~大喊大叫’를 많이 쓴다. >>맞는 문구: 我们吵架的时候,她总是对我大喊大叫! Wǒmen chǎojià de shíhòu, tā zǒngshì duì wǒ dàhǎn dàjiào!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
느낀다는 건 마음이 이뤄지는 것이다. 손과 발 피부로 눈으로 만져서 보아서 느끼는 것은 마음속에 느껴진 것들이 그려지고 이뤄지는 것이다. 느낌은 그런 것이다. 마음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손이나 발이 아닌 눈이나 코가 아닌 마음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동물의 느낌이 아닌, 가장 인간다운 느낌이 바로 감이다. 가장 인간다운 글자 단어가 바로 감인 것이다. 그래서 느낌의 감(感)은 갑골문은 청동기 시대의 금문에 와서야 발견된다. 마음 심(心) 위에 이룰 성(成)이 있는 모양이다. 이룬다는 게 무엇인가? 무기를, 집착을 내 욕망을, 내 주장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 것을 마음으로 하면 비로서 느낌이 온다. 내 무기를 내려놓고 내 집착을 버리면 비로소 주변의 풀벌레 소리가, 새소리가, 남의 말이 들린다. 신선한 바람이 느껴지고 나를 둘러싼 자연, 나 같은 것 혹 나와 다른 것들이 내 눈길에 내 후각에 내 촉각에 내 미각에 나의 피부에 접하고 있음을 비로소 느끼게 된다. 그 느낌, 바로 감(感)이다.
중국 유인우주선 선저우(神舟) 14호의 우주인 세 명이 지난 4일 183일간의 임무를 마치고 지구로 돌아왔다. 중국유인우주국(CMSA) 비행공정판공실에 따르면 선저우 14호 귀환 모듈은 4일 오후 8시 9분(현지시간) 네이멍구(內蒙古)자치구 둥펑(東風) 착륙장에 성공적으로 착륙했다. 현장 의료 체크 및 보장 인원들의 확인 결과 탑승한 우주인 세 명의 건강 상태는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선저우 14호 유인우주 비행 임무는 원만한 성공을 거두었다. 착륙 당일 19시 20분, 베이징우주비행관제센터는 지상 관측소를 통해 귀환 명령을 내렸고 선저우 14호 유인우주선의 궤도 모듈과 귀환모듈이 성공적으로 분리되었다. 이후 우주선은 귀환 엔진 점화를 했고 귀환모듈은 추진모듈과 분리됐다. 귀환모듈이 성공적으로 착륙한 후 수색 회수 임무를 맡은 수색 구조팀은 목표물을 발견하고 착륙 현장에 도착했다. 우주인 천둥(陳冬), 류양(劉洋), 차이쉬저(蔡旭哲)가 탑승한 선저우 14호는 지난 6월 5일 우주로 향했다. 간쑤성 주취안 위성발사센터에서 창정-2F 야오-14호 로켓에 실려 발사된 후 중국의 독자 우주정거장 톈궁(天宮)의 핵심 모듈인 톈허(天和)와 도킹해 조립체를 형성
성공이란 무엇인가? 이룬 것이다. 뭔가 이룬다는 건 무엇인가? 내려놓는 것이다. ‘이제 됐다’는 것, 내려놓는 것 바로 이룬 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완성의 경지다. 일찌감치 갑골자를 썼던 동양의 선인들이 본 경지다. 이룬다는 건, 시작이 아니다. 완성이요, 끝이다. 비로소 내려놓는 것이다. 갑골자 이룰 성(成)은 전투를 끝내고 큰 창을 내려 세워 잡고 있는 모습이다. 싸움의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큰 창이 쓰러지지 않은 걸 봐서 최소한 지지는 않았다. 큰 창을 내려 세운 모습이 사뭇 장엄하다. 이겼거나, 휴전한 것이다. 창을 내려 세워 잡은 모습에서 지지 않고 전쟁을 끝낸 병사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실제 춘추시대 문서 가운데는 이룰 성(成)을 휴전하다는 뜻으로 쓴 게 확인된다. “所以为成而归也。”(소이위성이귀야: 그래서 휴전을 해 되돌아가다.) 여씨춘추의 한 대목이다. 이긴 것을 성공으로 본 게 아니라, 지지 않은 걸 성공으로 본 것이다. 성공의 확률이 확 올라간다. 바로 손자가 이야기 한 ‘백전불태’(百戰不殆: 싸워서 위태롭지 않다)의 경지다. 진정한 ‘백전백승’(百戰百勝)이다. 지지 않아서 이긴다. 최고의 효율적인 승리다. 이기는 데 필요
입구가 셋 모인 게 품격의 품(品)이다. 세 입이 하나 같이 말해준다는 의미다. 평판은 그렇게 서로 다른 입들이 좋다, 나쁘다 등을 한 입처럼 같이 말해주는 게다. 평판이 쌓이면 그게 품(品)이 되고 품의 격(格)이 놓아진다. 격(格)은 좀 복잡한 한자다. 입구로 들어가는 발을 글자로 형상화 한 각(各)에 나무 목(木)을 더한 글이다. 층층이 다른 나무 가지들을 가리킨다는 게 일반적 설명이다. 품격은 이렇게 만들어진 글자다. 세 입이 한 결로 말한다는 의미다. 그럼 귀가 셋이 모이면 어떨까? 세 귀가 들은 풍월일까? 입이 말하는 것을 상징한다면, 귀는 마땅히 듣는 걸 상징해야 한다. 귀를 기울인다는 의미가 강해야 한다. 하지만 귀 셋은 여전히 말한다는 의미다. 귀 셋을 기울여야 할 정도의 작은 소리, 속삭임을 의미한다. 귀를 더욱 기울인다는 의미에서 섭(聶)은 섭(聂)이라고도 쓴다. 양 손으로 귀를 모아 듣는 모습이다. 귀 이(耳)를 쓰고 ‘말하다’고 하는 게 한자의 묘미다. 입 구(口)를 쓰고 ‘듣는다’고 하기도 한다. 들을 청(听)이다. 청(聽)의 간자체다. 입으로 듣고 귀로 말하는 게 한자의 세계관이다. 말이 있어 듣고, 듣기에 말이 있는 것이다.
"结婚她" "jiéhūn tā"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요 老师,看,这是我女朋友的照片。... Lǎoshī,kàn,zhèshì wǒ nǚpéngyǒu de zhàopiān. 선생님, 보세요, 제 여자친구 사진이에요. 啊! 真漂亮! A! Zhēn piàoliang! 아! 정말 예뻐요! 是啊,我很喜欢她,我想结婚她! Shì a,wǒ hěn xǐhuān tā,wǒxiǎng jiéhūn tā! 네, 정말 좋아해요,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요! *‘结婚’은 이합동사로 목적어가 바로 뒤에 올 수 없기 때문에, 꼭 ‘跟’ 이나 ‘和’ 등의 접속사와 함께 써야한다. ‘和~结婚’,‘跟~结婚’ 등을 예시로 들 수 있다. >>맞는 문구: 是啊,我很喜欢她,我想跟她结婚!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
삶에서 중요한 것은 마음의 정(靜)을 얻는 것이다. 마음이 정하면, 관조할 수 있고, 관조하는 삶은 나, 자(自)와 나 같은 주변, 자연(自然)을 새롭게 인식케 한다. 나 자(自)는 나 같은 것들, 자연(自然) 속에 있을 때 가장 편하고 오래 간다. 내가 더욱 ‘나’, 자기(自己)다워진다. 고요한 삶은 일시적 욕구를 즐기게 한다. 일탈은 색(色)이다. 삶을 다채롭게 한다. 고요할 정(靜)은 그래서 멈춤이 아니다. 정지된 게 아니다. 조용한 균일한 움직임이다. 이 도리를 선인들은 일찌감치 알았다. 갑골자 정(靜)은 우물 주변의 무성한 나무들을 손으로 정리하는 모습이다. 고요함을 얻는 방법이 한자 정(靜)에 담긴 것이다. 고요는 사람의 손길로 무성한 나무를 정리해 얻는 것이다. 살아 있는 한, 고요는 그냥 오지 않는다. 우물 주변에 무성하게 자란 상념들처럼, 순간순간의 욕정과 욕망들이 교차한다. 그것을 손으로 정리해 내는 게 바로 고요함을 얻는 방법이다. 마음을 쓸어 비운다는 표현이 너무도 적절하다. 한자의 정(靜)에 푸를 청(靑)과 다툼의 쟁(爭)이 들어 있는 이유다. 푸름을 다툴 때, 비로소 정(靜)을 얻는 것이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은 여성의 삶이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 얼마나 서글픈지, 얼마나 부조리한지 보여준다. 흔히 삼종지의(三從之義)라 했다. 어려서는 부친을 따르고, 결혼해선 남편을 따르면, 늙어서는 자식을 따른다는 말이다. 모파상의 소설도 삼종지의에 대한 서양적 진실이다. 동양은 일찍이 모계사회였다고 하는데, 갑골자로 본 여성은 너무도 일찍이 순종의 덕을 실천하는 모습이다. 계집 녀(女)는 누가 봐도 한 여성이 무릎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 여성이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는 게 어미 모(母)다. 계집 녀(女)에서 젖가슴이 강조됐다.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숭고한 모습이다. 재미있는 게 어미 모(母) 자형의 발전이다. 계집 녀(女)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진다는 것이다. 예서에서 어미 모(母)는 어미일 뿐이다. 계집 녀(女)의 모습이 글자 속으로 사라진다. 계집 녀(女) 발전사에 가장 서글픈 모습이 노비 노(奴)다. 여성의 팔을 비틀어 뒤로 잡아채는 모습이다. 여성을 뒤로 낚아채 마음대로 하는 게 노예다. 낯선 사내에 이끌려 낯선 곳에서 온갖 잡일을 다하며 아이도 낳아야 했던 게 노예다. 손에 이끌린 여성이다. 그 마음
불타는 초가 바로 주다. 스스로를 태워 빛을 내는 초다. 바로 주(主)의 도리다. 그래 본래의 주는 소유하지 않으며 강제하지 않는다. 그저 주변을 밝혀 어둠을 밝혀 양과 음을 구(區)하며 명과 암을 나눈다. 성경과 사서삼경이 책 한 권을 밝히는 도리를 한자 주(主)는 한 글자에 담고 있다. 한자 주(主)의 도리다. 갑골자 주는 대형 초다. 불타는 초다. 나뭇가지 위로 춤추는 화염(火焰)과 화심(火心)히 보인다. 화염은 광(光)의 시작이다. 빛은 주의 발현이다. 한자 주(主)는 스스로 주인 됨을 주장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태워 밝힐 뿐이다. 소유하지 않고 밝혀 있음과 없음을 구분해 낼 뿐이다. 사실 소유(所有)가 본래 그렇다. 그저 거기 있음을 밝히는 게 바로 소유다. 여기서 소유하지 않는다고 함은, 본래의 소유를 할 뿐, 요즘의 의미처럼 법적 권한을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는 그래서 큰 학문의 시작이다. 대학의 도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다. ‘대학지도 재명명덕’ (大學之道 在明明德) 모든 게 스스로를 태워 주는 주(主)의 덕이다. 내가 없을 때 비로소 진정한 내가 있다 바로 노자의 도(道)다. 진정한 주인(主人)의 도다.
나무가 나무인 이유는 풀이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풀이 풀인 이유는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동물이 동물인 이유는 식물이 있기 때문이요, 꽃이 꽃인 이유는 풀이 있어 꽃과 풀이 다른 탓이다. 자연의 법칙이다. 서로 달라 조화롭고 서로 달라 화음을 낸다. 자연의 법칙, 그대로가 적용되는 게 한자의 세계다. 한자의 세계는 평등하다. 상호의존적이다. 한자 하나하나가 자신의 뜻을 갖고 문장 속에서 그 뜻을 발현한다. 한자의 뜻은 한자와 한자의 관계 속에서 더 분명해진다. 문장 속에 또 다른 한자와 호응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차이는 필요할 때만 드러난다. 예컨대 ‘간(干), 우(于), 천(千)’ 모두 비슷하다. 차이가 적다. 그저 기울기가 다르고 꼬리 모양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의미는 서로 완전히 다르다. 간은 ‘줄기’, ‘’행하다‘는 뜻이고 우는 ‘~에’, ‘~보다’는 조사다. 천은 '10의 100배'요, '100의 10배'다. 생김새만 놓고 문장에서 한 글자만 쓴다면, 간을 우 같은들 우가 천 같은들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한자는 이렇게 평소에 구별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한 문장에 동시에 간이나 우, 우나 천 등 두 글자 이상 쓰이는 경우, 간은 다시 간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