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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의 시작 - 호암 이병철(22)

“우리가 필요한 것은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제일제당의 탄생

 

제일제당의 탄생

대구의 조선양조장이 마련한 3억 원은 이병철에게는 기사회생의 활로였다. 이병철은 1951 1 10일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를 세운다. 서울의 과거 삼성물산 이름을 따왔지만, 이름만 같을 뿐 속내는 완전히 새로운 회사였다.

 

이병철의 증언이다.

삼성물산의 재산은 이미 오유烏有로 돌아갔으므로, 부산에서의 삼성 재건은 그야말로 무에서 다시 출범한 것이다."물론 여기에는 과거 공신들이 적지 않이 합류했다. 본래 서울에서 신생사를 1년만에 당대 1,2위 무역상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도록 만들었던 맹장들이었다. 부산의 삼성물산은 날개를 단 듯 성장했다. 설립 1년후에는 결산에서 3억 원의 출자금이 그 20배인 60억 원으로 불어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성장도 이병철에게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전쟁의 황량한 조국을 보면서 현지에 거의 모든 생필품을 수입해 조달해 돈을 버는 자신의 처지가 오히려 곱게보지만 않았던 것이다."무역업이 당시 한국의 국가적 급선무였던 것은 오늘과 다를 바 없었다. 특히 당시는 극도의 물자부족 시대였던 만큼, 수입이야말로 시급하고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

 

이병철의 생각은 여기서 멈췄다. '우리 국민이 필요한 것을 언제까지 수입해다만 쓸 것이냐?'는 생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그 고심 끝에 나온 것이 '우리가 필요한 것은 우리가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이었다. 생산시설을 갖춘 제조업을 하자. 이병철은 이렇게 결심을 한다. 그런데 무엇을 먼저 할 것인가? 여기서 다시 이병철의 남다른 점이 두드러진다.

 

 

당시 한국전쟁은 소강상태였다. 후방 부산은 그로 인해 전쟁중의 평화상태에 빠진다. 이병철은 일단 이 같은 전쟁의 추세를 면밀히 관찰하면서 삼성물산 식구들의 의견을 구했다. 당연히 모두가 반대였다. "지금도 돈을 많이 벌고 있는데, 왜 새로운 위험을 감수해야 합니까?" 일리 있는 반대였다. 우선 자금이 문제였다. 돈은 벌고 있지만, 그 돈으로 장기간 생산설비를 마련하는 데 묶어 둔다면 잘나가는 삼성물산은 자칫 유동성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생산설비 마련과 생산이 성공했다고 해도 그 제품의 질이 당장 해외 유수 제품을 따라 잡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그러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그럼 어떻게 시장에 파느냐는 게 문제였다. 모두가 장기적인 과제이지 당장 시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회사의 흥망이 걸린 문제여서 수차례 회의가 열렸지만, 결론은 이렇게 원을 그리며 맴돌았다. 결국 결단은 오직 한 명만 할 수 있는 상황이 됐다.이 때의 이병철 생각은 확고했다. "누군가 가야 할 길이라면 내가 선봉을 서겠다." 무엇보다 모두가 한다고 나설 때 한다면 이미 뒤쳐진다는 게 이병철의 생각이었다. 당시 심정에 대해 이병철은 훗날 이렇게 회고 했다.

 

 

 

 

"왜 전재戰災의 폐허 속에서도 제조업을 결의하게 되었는지, 그 본 뜻을 다시 한번 밝혀 두고자 한다. … 수입에만 의존하고 있으면 해외 의존의 국민생활이나 경제 체질을 영원히 탈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국가 경제의 자립적인 형성이나 그 발전은 기대할 수 없다.… 문자 그대로 개척정신과 확고한 사명감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병철은 제조업에 대한 여러가지 조사에 착수한다. 우선 제지, 항생물질 등 제약, 설탕의 국내 생산 능력은 당시 한국에 전무한 상태였다. 이들 물질은 국민생활에 긴요한 물자이면서도 수입에만 의존하는 실정이어서 수입대체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세가지 모두 한국에 중요한 산업이었다. 

 

이병철은 관련해 세가지 제조업을 시작하는 견적서를 일본 미쓰이 물산에 의뢰한다. 제당은 3개월만에 입수했는데, 제약은 6개월, 제지는 8개월이 걸린다고 했다. 이병철은 제당을 선택했다 

1953 4월 부산 대교로의 삼성물산 사무실 내에서 제당회사 창립사무소를 설치했다. 6월에는 발기인 총회를 열었다. 한국전쟁 휴전 1개월 전의 일이었다. 

 

 

한국정부는 그 해 2 15일 원을 환으로 바꾸면서 100 1로 명목 단위를 절하하는 화폐개혁을 단행했다. 다행히 예금동결 등의 조치는 없었다. 이병철은 그나마 무리없이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사명은 '제일제당 공업주식회사'였다. 자본금 새로운 화폐로 2000만 환, 사명에는 각오와 기개를 담았다고 훗날 이병철은 회고했다. 한국의 첫 제조업 제일제당은 이렇게 탄생을 하게 된 것이다. 이 때 이병철의 나이 43세였다. 

 

"무슨 일에나 제일의 기개로 임하자. 제일제당은 해방 후 우리 나라에 걸설된 최초의 현대적 대규모 생산시설이다. 앞으로 항상 한국경제의 제일 주자로서 국가와 민족의 번영에 크게 기여해 나가자." 이병철이 자서전에 남긴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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