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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의 시작 - 호암 이병철(26)

한국인에 의한 가장 한국적인 ‘정원공장’, 제일모직

 

한국인에 의한 가장 한국적인정원공장’, 제일모직

여러 우여곡절 끝에 제일모직 공장 건축은 시작됐다. 이병철의 결심은 확고했다. ‘우리 손으로 하자. 비록 수입제 기계를 쓴다고 해도 다른 모든 것은 우리 손으로 하자.’ 자연스럽게 이병철의 철학이 공장에 녹아들었다. 어쩔 수 없이 자주 현장을 방문해 공장 하나하나왜 그렇게 지어야 하는지를 직접 설명해야 했다.

 

 

이병철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기술자를 비롯한 건설 요원들에게 우리가 왜 모직 공장을 지어야 하는지를 설명했다. 우리 자신의 손으로 완성한 공장이 혹시라도 잘못된 데가 있을 경우에는 우리나라 기술자의 체면은 땅에 떨어진다고 독려를 했다. 각 부문의 기술 책임자에게는 기술 문제는 전폭적으로 일임한다고 당부하면서, 모직공장에 거의 나의 꿈과 이상을 털어 놓았다. 그리고우리나라 최초의 모직공장이긴 하지만 결코 국제 수준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고 거듭 당부하기도 했다.

 

 

 

그랬다. 제일모직 공장은 경영자 이병철의 이상과 꿈이 담긴 곳이었다. 대표적인 곳이 여성 기숙사였다. 공장이 가동되면 1000명이 넘는 젊은 여성들이 숙식을 해결하며 일을 해야 했다. 역시 이병철의 고백이다.

 

 

“도쿄 유학시절에 읽었던여공애사는 비참한 노동조건 아래에서 일하는 방적공장의 참담한 여공생활을 그린 것이었는데, 그 당시 큰 충격을 받았다. 나의 공장이 그래서는 결코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우선 그들이 숙식할 기숙사에는 최상급 쾌적한 시설을 갖추도록 하자. 이렇게 굳게 마음 먹고 전관에 스팀 난방을 설치했다. 요즘은 흔하지만 공장 내의 스팀 난방은 우리나라에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목욕실, 세탁실 다리미실, 휴게실 등에도 경비를 아끼지 않았다. 사치스럽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복도에는 회나무를 깔아 차분한 안정감이 나도록 하였다. 공장 내의 환경미화에도 큰 관심을 쏟았다. 식수에 돈을 아끼지 않았고 연못과 분수도 마련하였으며, 공장부지 전체를 잘 다듬어진 정원으로 생각하는, 말하자면 정원庭園공장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 꾸미고 싶었던 것이다.”

 

 

자서전은 훗날의 감회까지 적혀 있다. “그 때 심었던 갖가지 수목은 지금 공장 건물을 거의 뒤덮을 만큼 훌륭하게 자랐고 잔디도 곱게 자라, 대구시민들 사이에서는 우리 공장을 제일공원이라고 부르기까지 한다.”

 

 

그럼 왜 이병철은 공장에 이렇게 심혈을 쏟았을까? 역시 이병철의 목소리다. “숙사나 조경에 그토록 마음을 쓴 것은, 여자종업원을 포함하여 모든 종업원을 가족적으로 대우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동시에 쾌적한 환경 속에서 일하면 작업능률도 반드시 향상 되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병철의 이런 마음은 당시 건장 건설에 참여한 건설 요원들도 감읍하는 것이었다. 모두가 한마음이 돼 공장 건설에 매진했고, 공사는 급진전돼 예정보다 반년이나 앞당겨 6개월만에 모직의 모를 정리하는 공장이 완성됐다. 다음해인 1956년 초까지 염색 공장까지 각 단계별 공장이 하나씩 완성돼 갔다.

 

 

 

드디어 공장이 첫 시운전에 들어간다. 이병철의 가슴도 뛰었다. 바로 1956 5 2일의 일이다. 원모염색, 가공, 방직, 기계등 각분야의 기술 습득을 위해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 각국에서 6개월간 기술을 익힌 연수생들도 이 때 모두 귀국을 하였다. 마침내 산업 시설이 거의 전무했던 척박한 한국 땅에 첫 한국의 손으로 지은 공장이 가동에 들어가는 것이다.

 

 

제일제당이 그랬지만, 불과 6개월 배운 실력으로 어찌 외국제 최고급 기계를 능숙하게 다룰 수 있을까? 이병철의 회고에 따르면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너무 처참했다.

 

 

“직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디자인 색조 등은 겉보기에 전혀 나무랄 데가 없었으나, 손으로 만져보니 어딘가 모르게 힘이 없는 감촉이었다. 영국제에 못지 않은 것이 처음부터 나오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예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서독 기술자들도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이병철은 낙담하지 않았다. 제일제당의 경험도 큰 힘이 됐다. 모든 공정을 처음부터 다시 점검했다. 문제는 곧 발견됐다. 마지막 공정인 압착, 즉 프레스가 불안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제품의 질이 당장 좋아지지는 않았다. 이병철은 연구 개발비를 아끼지 않고, 적합한 양모 선정과 계속적인 공정의 합리화를 추구해갔다.

 

 

시장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제일모직 제품이 6분의 1 가격에 시장에 나왔지만,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다. 질이 안좋다는 평 때문이었다. 하지만 제일모직의 제품 질이 꾸준히 나아지면서 시장의 반응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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