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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운의 지도자 류샤오치 10] 부부는 그렇게 마지막 손을 잡았다

 

그래도 국가 주석인데...

류샤오치에 대한 홍위병들의 핍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1967년 8월 5일도 류샤오치는 홍위병에 끌려가 자아비판을 해야 했다.

덩치 큰 몇몇이 류샤오치를 무릎 꿇게 하고 두 손은 뒤로 묶었다. 큰 손으로 머리를 눌러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숙이도록 했다. 때때로 류샤오치의 머리를 들어 무릎을 꿇은 채로 사진을 찍도록 했다.

이 때 류샤오치는 여전히 중국의 국가 주석직을 유지한 채였다. 홍위병들의 손에 중국 국가 주석이 무릎을 꿇은 채 허리를 숙이고 고개를 굽히는 굴욕을 겪어야 했던 것이다.

거친 사내들의 손에 류샤오치의 흰 머리가 더욱 흐트러졌다.

하지만 참을 수 없는 굴욕도 굴욕이었지만, 류샤오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다른 것이었다. 바로 인근에서는 다른 홍위병에 둘러싸여 비판을 받고 있는 그의 아내 왕광메이였다.

왕광메이와 류샤오치는 홍위병에 의해 각자 격리된 상태였다. 한동안 소식을 몰랐던 아내가 인근에서 고초를 치르는 모습에 류샤오치의 가슴이 미어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홍위병들은 왕광메이에게는 물리적 구타를 하지 않은 듯 보였다. 비판을 받는 류샤오치의 얼굴에는 비오듯 땀이 흘렀다. 이 때 류샤오치의 몸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허리를 펴지 못했고 다리를 절었다.

그런 상태에서 장시간 무릎을 꿇어야 하니, 류샤오치는 제 때 일어서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바로 그 때였다.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왕광메이의 눈에 처참한 류샤오치의 모습이 들어온 것이다. 왕광메이가 갑자기 미친 듯 류샤오치를 향해 달려갔다.

“류샤오치” 왕광메이가 소리를 쳤고, 그제야 류샤오치가 고개를 들어 달려오는 아내를 보고 손을 뻗었다.

왕광메이도 힘껏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노부부는 서로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그 순간은 길지 않았다. 홍위병들이 놀라 뒤쫓아 와 왕광메이를 잡았다. 다른 홍위병들이 류샤오치를 에워쌌다. 왕광메이가 류샤오치의 손을 잡고 놓지 않으려 했지만 홍위병들의 힘에 둘은 바로 떨어져야 했다.

류샤오치의 눈에도, 왕광메이의 눈에도 눈물이 흘렀다. 홍위병들은 두 노부부의 짧은 해우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 순간 류샤오치도, 왕광메이도 심지어 당시 자리에 있던 홍위병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 것이 노부부의 마지막 해우였다는 것을.

노부부는 그렇게 마지막 짧게 손을 잡을 수 있었다. 이 장면에 대해 류샤오치의 가족은 정말 영화의 한 장면처럼 회고를 했다. 그 장면을 본 순간 류샤오치와 가족은 제대로 울지도 못했다고 한다. 정작 울음을 울 수 있었던 것은 수십년이 지나서 류샤오치 복권이 이뤄지고 당시 상황에 대한 회고가 허락됐을 때였다.

8월 5일 자이비판을 끝낸 류샤오치는 정말 가슴 속에 치미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홍위병에 의해 다시 사무실에 돌아온 류샤오치는 비서에게 말했다. “‘중화인민공화국 헌법’을 가져오라! 그래도 내가 이 나라의 국가 주석이다. 개인 류샤오치야 마음대로 할 수 있다지만, 어찌 국가 주석이 이런 처분을 받는가. 국가주석이라는 최소한의 존중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법 절차는 어디로 갔나? 설사 개인이라고 해도 최소한 법 절차에 맞게 처분 받아야 하는 게 아닌가!”

이틀 뒤 8월 7일 류샤오치는 마오쩌둥에게 짧지만 강한 어투로 항의한다. “왜 제가 반당, 반사회주의의 죄명을 뒤집어 써야 합니까?”류샤오치는 스스로 이름뿐인 주석직을 사퇴하겠다고 청했다. “저는 이미 연금돼 자유를 잃었습니다.”

실제 이 때 류샤오치는 아내와 자녀들과 한 공간에 있었지만 사무실에 사실상 연금상태로 서로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 상태였다고 중국 당사는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류샤오치의 편지에 답을 하지 않는다. 중국 국가 주석 류샤오치는 그렇게 쓸쓸히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홀로 남은 류샤오치의 병은 갈수록 깊어졌다. 이제 세상에 정말 홀로 남았다는 외로움이 그를 더욱 병들게 했다. 의사들도 류샤오치의 병을 제대로 진료하기 힘들었다. 진료는 비판 대회를 열어 류샤오치를 비판한 뒤에야 가능했다. 병을 낳자고 진료를 하지만 그 직전을 병을 더하기를 반복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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