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는 없다는 것이다.
없다는 것은 어찌 알까?
한자를 그런 무(無)를 표시했다.
그것도 상형자다.
도대체 어떤 모습에서 없다는 것을
있지 않다는 것을
표시할 수 있었을까?
사실 없다는 것은
있는 것을 다 알고,
그리고 나서야
비로소 아는 것이다.
있는 것들,
그 외 것이 바로 무(無)인 것이다.
있는 것을 빌어
없음을 아는 것이다.
사실 갑골자의 무(無)가 그렇다.
춤을 추는 모습이다.
춤을 추며 손에 든 것을
몸에 부착한 것을
모두 보여주는 게 바로 무(無)다.
춤이라는 의미의 무(舞)가 생기면서
없을 무(無)와 구분됐지만
없을 무(無)나
춤출 무(舞)나
본래 하나의 글자였다.
없다는 것은 있다는 것을
다 보여준 뒤야
비로소 알게 된다.
내 곁에 무엇이 없는지를 ….
갑골자 무는 그렇게
실제론 가차자다.
춤 무(舞)를 빌어 없을 (無)로 썼다.
있음을 빌어
없음을 표기한 것이다.
“遥知兄弟登高处, 遍插茱萸少一人。”
(요지형제등고처, 편차수유소일인)
“저 멀리 형제들 산에 올랐겠지.
그리고
돌아가며 수유나무 가지를 머리에 꽂다
그 때 비로소
다시 알겠지. 내가 자리에 없음을 ….”
당나라 시인 왕유의 시 한 구절이다.
중양절 산에 올라 수유나무 가지를 머리에 꽂는 풍습을 견줘
형제애를 그렸다.
수유나무는 항상 준비하는 것이다.
있는 것이다.
그 수유나무를 형제들에게 나눠주다
문뜩 새롭게 안다.
나 우리 형제 왕유가
이 자리에 없구나.
있었기에,
있기에
비로소 아는 것이다.
이제 없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