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름은 맑음이다.
푸름을 비춰
더 푸르게 하는 맑음이다.
그게 푸를 청(靑)이다.
글자의 뜻이 그렇다.
우물이 비춘
푸른 나무가
바로 푸를 청이다.
푸름, 푸르름에 대한
인간의 첫 연의(演義)다.
푸르다는 것에 대한
가장 원초적이고
철학적인 답이다.
푸를 청은 그래서
인문학적, 인식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담고 있다.
왜 푸른 나무로
푸름을 표현하지 않았을까?
왜 맑은 물에서
푸름을 봤을까?
왜 물은 푸름을 비춰
더 푸르게 하는 것일까?
사실 푸른 색을
검은 글자로
표시하는 유일한 길이
연역이다.
부연해 설명하는 것이다.
맑은 물에 비친 푸른 나무.
수많은 질문과 그 답을
담은 글자가
바로 푸를 청이다.
청(靑)은 그래서
시작이다.
맑음과 푸름
그 관계의
시작이다.
푸름에 대한 첫 비춤이요,
인식이다.
일본의 한 학자는
그래서
푸를 청을 농경의 의식으로 봤다.
농사를 시작하는
계절, 봄에
농기구를 피로 씻어내고
다시 그 피를
맑은 물로 씻어내는
과정이라고 했다.
삶을 이어가는
원동력, 농사의 시작을
푸를 청이라 본 것이다.
어쨌든 청은 그래서
관계로 이뤄진
삶의 시작이다.
그래서 청춘은
푸르다.
비춤의 첫 봄이다.
청년은 푸른 나이다.
주변의 푸름을 비춰
더욱 푸르게 되는 나이다.
사회를 비춰
스스로 더욱 푸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