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력을 잃은 노예, 백성 민은 노동이 무기였다. 점차 민은 직업을 가진 노동력을 의미하게 됐고, 귀족들은 민의 주인 됨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자각하게 됐다. 그렇게 민은 조금씩 역사의 굴곡을 기어 나왔다.
학자들은 ‘민’이 백성이란 의미를 갖게 된 것을 주(周) 나라 때로 보고 있다.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그 의미가 확고해졌다는 게 학자들의 견해다.
주나라 이전의 풍속을 노래한 시경 소아(小雅)의 ‘어떤 풀이 시들지 않느냐(何草不黃)’라는 시에 "부역 간 장부들만 불쌍하네, 그들만 홀로 백성(民)이 아니란 말인가 (哀我征夫, 獨爲匪民:애아정부, 독위비민)"라고 노래했다. 즉 부역 간 장부가 ‘민’의 대접을 못 받고 있다고 한탄한 것이다.
노예가 아니라, 이제 대접을 받는 백성이 된 것이다. 정말 시력을 잃은 노예에서 상상도 못하던 변화다.
그러나 오늘날과 같은 민의 의미는 아직 아니다. 이때만 해도 지금 흔히 쓰는 '민주'民主라는 말은 그 의미가 달랐다. 춘추전국시대 민주는 민이 주인됨이 아니라, 민의 주인 즉 군주를 의미했다.
주나라 이전 왕조 역사를 다룬 상서(尙書)에서 ‘민주’ 란 단어가 군주란 뜻이었고 그 뒤 수백 년이 지난 삼국지 오서(吳書)에서도 "신하가 군주를 따름에 있어 법에 의해야 한다(夫爲民主, 當以法率下:부위민주, 당이법솔하)"며 ‘민주’를 군주라는 의미로 썼다.
민의 지위도 높아졌지만 그것은 군주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춘추전국시대 왕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노비였던 민을 자유화해 농사를 짓도록 해 사회 생산력을 높였다.
맹자에 이르러 ‘민’은 또 한번 직위가 격상된다. ‘역성혁명론’으로 임금(君)까지도 내몰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는다. "민을 귀하게 여기고 사직이 그다음이며 군은 가벼이 여긴다" 맹자, 진심 하에 나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은 여전히 주인이 아니다. 사실 여기에 우리 동양은 서양과 근본적 관념의 차이를 가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