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게 무엇인가? 인간의 인식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질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인식하고 기억하는가? 무엇을 안다고 하는가? 어렵고 복잡한 질문이다. 질문이 삶의 본질에서 사건의 지평선 경계까지 맞닿아 있는 탓이다. 삶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처럼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가장 길게 연구돼 마치 모두가 다 아는 양 여겨지는 그런 질문이다. 그런데 정작 그 답을 하는 이는 드물다. 역시 그 질문이 삶의 본질에서 사건의 지평선 경계까지 맞닿아 있는 탓이다. 동양의 사고는 보다 본질적이다. 욕망을 부인하지 않고, 그 욕망을 본질로 보고 인간이 갖는 모든 질문에 답을 찾는다. 그 동양적 사고에 기초하면 사람의 본질은 동물이다. 동물은 생존과 번식이 본질적 목적이다. 간단히, 살아남는 것이다. 살아남아 전하는 것이다. 자식을 낳아 종족을 자신 속의 DNA를 자신의 삶의 흔적을, 기억을 그 흔적과 기억이 영원히 살아남도록 자자손손 전하는 것이다. 동양에서 안다는 것은 이 같은 삶과 죽음의 순환 고리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 고리 속에 새로운 삶과 새로운 죽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처음 안다는 뜻의 지(知)를 보고 스스로 물었다. 화살 시(矢)과 입(口)이 어찌 ‘안
믿음이다. 사람의 말(言)이다. 사람의 말이 믿음이다. 더 정확히는 사람의 말이어서 믿음이 필요하단 의미다. 사람의 말이 있고, 믿음의 중요해졌다는 의미다. 사람의 말이라는 뜻의 신은 그래서 중의적이다. 사람의 말이어서 믿을 수 있고, 사람의 말이어서 믿을 수 없다는 의미다. 역사 속에 믿을 신(信)은 갑골문이 아니라 금문에서 등장한다. 사람(人)과 말(言)의 회의자다. 말은 신(信)보다 오래된 글자다. 갑골문에서도 나온다. 말은 혀를 바늘로 꿰뚫은 모양이다. 일본 학자들은 원시시대 제사를 지내고 주문(呪文)을 담은 그릇의 신성(神聖)을 보존하기 위해 봉인한 모습이라고 설명한다. 굳이 원시시대 제사의 모습은 아니어도 혀를 바늘로 꿰뚫어 다시 말을 못하게 한 모습으로 보인다. 말이라는 게 한번 하면 바꾸기 어렵다는 의미로 보인다. 사실 말이라는 게 사람만 하는 것이다. 당초 이 말씀 언(言)의 뜻이 사람의 말이요, 기도요, 소식이요, 믿음이란 의미였을 듯싶다. 하지만 사람의 말이 있어 의혹이 생기고 불신이 생기는 법이다. 그래서 다시 사람이 더해져 강조된다. 믿음이 사라지며 나온 글자가 믿음인 것이다. 역사가 증명을 한다. 믿을 신(信)이란 글자는 금문의 시대
동서양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숫자에 대한 생각이다. 삶에 대한 자세다. 고개가 갸웃거린다. 숫자와 삶이라니? 한자와 그리스 숫자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한자는 동양 사상의 대표이고, 그리스는 서양 사상의 대표다 一, 二, 三 동양의 숫자다. Ⅰ, Ⅱ, Ⅲ 그리스의 숫자다. 동양의 숫자는 쌓여가고, 그리스의 숫자는 나열된다. 쌓여가는 것과 나열되는 것 바로 동서양의 차이다. 삶과 숫자는 무슨 관계일까? 삶은 간단히 숫자를 세는 일이다. 시간을 세고, 하루를 세고 계절을 세고 한해를 센다. 동양의 숫자는 그런데 쌓여가고 서양의 숫자는 나열된다. 동양의 삶은 쌓여서 세고 서양의 삶은 나열돼 세는 것이다. 쌓여가는 것은 지난 수 없이 새로운 수가 없다. 쌓지 않고는, 일이 없으면, 이가 없는 것이다. 서양의 숫자는 이 점에서 차이가 난다. 앞 수와 이어지는 새 수의 관계가 느슨하다. 아래 없이 위가 없는, 쌓여가는 동양의 숫자와 차이가 있다. 지난 순간 없이 새로운 순간이 없는 게 동양 삶의 자세다. 그래서 동양은 깊이 높게 쌓인 것들에 맨 아래 수에, 조상에 각별하다. 그래서 동양의 시인은 묻는다. 청산이여, 그댄 몇 번이나 이 석양을 세었는가? 靑山, 幾渡夕
무엇이 세계를 만들었을까? 무엇이 차이를 만들었을까? 한자는 만물을 담은 글자다. 또 만물에 인간의 생각을 투영한 글자다. 상형자를 기본으로 발달한 한자야말로, 플라톤이 만든 이데아(본질)와 티마이오소(이데아의 모조) 관계 설정에 딱 어울린다. 한자는 이데아요, 티마이오소다. 둘 사이의 관계인 미메시스(모방)다. 한자는 사물의 모방에서 시작해 거꾸로 인간의 생각을 사물에 투영해내고 있다. 그 모든 것의 시작은 무엇일까? 원천이요, 근원이다. 본래 점이지만, 한자는 좀 입체적이다. 점들의 모임, 연결된 하나, 바로 선이다. 수렴선이요, 기준이다. 한자의 일(一)이다. 일은 통계의 수렴선이다. 기준은 사물을 대표하는 것이며, 수렴되는 변화들의 집합이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다. 공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일(一)이다. 만물을 관통하는 하나의 선, 그것은 위치도, 변화의 모양도 다를 수 있지만 모두가 하나의 선일뿐이다. 5000년 전의 갑골문에서 오늘날까지 일(一)자는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기준, 아니 수렴선이기 때문이다. 만물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일이 수렴선이요, 기준인 것은 인간의 한계 탓이다. 수렴선은 산포된 점들이 자연스럽게 만드는 것이요, 그
지(志), 마음에 놓인 선비라는 뜻이다. 마음에 선비를 품는다. 다른 게 아니라 뜻이다. 의(意)요, 지(志)다. 마음에서 우러나는 소리요, 내 마음 속 선비다. 본래 선비란 무엇인가? 조선에서 ‘선비’라 했지, 본래는 그냥 ‘사’(士)다. 사실 선비의 사는 상형자다. 도끼의 모습이다. 본래 임금 왕(王)과 같이 쓰이기도 했다. 임금의 도끼가 더 크고 사의 도끼는 적다. 임금을 뜻하는 도끼 위에 한 획을 더하면서 글자의 차이가 생긴다. 사는 고대 가장 지위가 낮은 귀족이었다. 고대 형을 집행하는 관료를 의미했다. 문과 무를 관장해 전쟁을 치르는 계급이기도 했다. 춘추시대까지는 이 사 계급만이 전쟁에 나가 싸울 수 있었다. 전국시대에 들면서 사 계급 아래 병졸이 생기는 전면전 시대가 됐다. 유럽으로 치면 기사 계급이었던 셈이다. 그냥 마음이 아니라, 형벌을 행하는 마음. 바로 지(志)인 것이다. 반드시 지키고 지키지 않으면 스스로를 벌하겠다는 각오인 셈이다. 설문해자 해석은 좀 다르다. 갑골문자는 청나라 말기 발견됐다. 갑골문자에 대한 연구로 한자의 고대 의미들이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 많은 문헌의 의미도 새롭게 달라지고 있다. 그럼에도 설문해자는 당대 한자에
'우리'는 나와 너의 조화다. 나만 있어도, 너만 있어도 '우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너와 나의 조합은 '너희'다. 결국 우리가 너희이며, 너희가 바로 우리다. 동양 고전에 큰 줄기를 형성하는 사물의 이치다. 철학적으로는 주역의 "음(陰) 속에 양(陽)이 있고, 양 속에 음이 있다"는 이치이며, 불가의 '색즉시공'(色卽是空) 사상에서도 보인다. 생활 속의 모두가 동포요, 친구라는 '사해주의'(四海主意)다. 서양에서는 19세기말 겨우 인간의 무의식에 관심을 갖으며 등장한다. 칼 융의 아니무스(여성의 남성적 무의식)와 아니마(남성의 여성적 무의식)과 비슷하다. ‘우리가 바로 너희다.’ 바로 역(易)의 사상이다. 갑골문에서 역은 내 술잔의 술을 네게 나눠주는 모양의 글자다. 예수의 포도주다. 내가 네게로 들어가는 순간이다. 예수는 포도주와 빵을 영과 육에 비유하기도 했다. 역의 자형에 대해서 주물하는 모양이라 설명하는 이도 있고, 위 태양과 아래 태음이 서로 뒤바뀌는 모습이라 설명하는 이도 있다. 갑골문에서 발달하는 글자들은 역(易)이 처음 같은 두 그릇 가운데 한 곳에 담긴 액체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는 모습이었다가 조금씩 한 그릇에서 옮겨지는 모습만 남은
마음속에 뭔가가 떠나지 않는다. 뭔가 가슴에 남아 끊임없이 스스로를 괴롭히지는 않는가? 마치 가시처럼 찌르지 않는가? 념(念)이다. 념은 지금(今)의 마음(心)이다. 마음의 지금이다.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는 것이다. 마음속에 항상 ‘지금’처럼 머물고 떠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념이다. 념은 그래서 집요하다. 집념(執念)이 그렇다. 사전적으로 념은 “한 가지 일에 매달려 마음을 쏟음. 또는 그 마음이나 생각”이라는 뜻이다. 념은 그래서 ‘읽다’는 뜻보다 ‘외우다’는 뜻이 강하다. 마음에 새긴다는 의미다. 념은 항상 내 마음에 지금처럼 머무는 것이다. 금(今)은 본래 그 의미가 심장한, 무서운 말이다. 본래 금은 짧을수록 편하다. 지금(只今)이란 말이 ‘방금’이라는 뜻인 이유다. 한자 금은 상형자다. 입에 물건을 물고 있는 모습이다. 입에 무엇인가를 물고 있으면 이를 악물게 된다. 이를 악물고 있는 것이 ‘지금’의 ‘금’이다. 이게 음식인지, 독인지는 아직 모른다. 삼켜야 아는 데 입에 물고만 있는 게 지금의 금이다. 바로 한 순간이라는 뜻이 그래서 나왔다. 그런 금이 마음에 닿아 있다. 그게 념이다. 마음에서 입 밖으로 나가야하는 것인지, 마음속에 그저 담
조화(調和)로운 사회는 동양이 꿈꿔온 최상의 인간 사회다. 그런데 정작 조화가 무엇인지 아는 이 드물다. 너무 곳곳에 널려 있어 그런지 모른다. 동양의 모두가 추구했던 조화는 우리 주변의 돌덩이다. 바로 자연(自然)이다. 한자로 자연은 스스로 혹 나 자(自)에 그럴 연(然)이 합쳐진 단어다. 한마디로 ‘나 같은’, 혹 ‘나인 나’란 의미다. 가장 나인 존재가 바로 자연이다. 개인적으로 내가 가장 나인 상태로 있는 게 자연이고, 넓게는 모든 만물이 가장 스스로인 상태가 바로 자연이다. 결국 자연은 ‘만물이 스스로 자신으로 존재하는 상태’다. 사물이 균형을 찾은 가장 편한 상태다. 그게 물리(物理)다. 사물의 이치다. 자연이란 세상 만물이 가장 편한 상태다. 다시 자연을 보라. 그 속의 ‘나’들은 ‘너’와 함께 ‘우리’를 만든다. 너라는 존재가 있어야 우리가 되는 것이다. 바로 자연은 나와 너가 우리로 존재하는 공간이다. 자연 속의 ‘가장 나인 나’의 존재는 ‘나’와 ‘나’ 사이의 평형, 서로 끌어당기되 부딪치지 않고, 서로 밀어주되 서로 버리지 않는 ‘우리’라는 관계로 존재한다. 자연이 바로 조화(調和)요, 평형(平衡), 균형(均衡) 상태의 구현이다. 세상
중국의 허난성 위성TV가 중국전통의 뚜안우 지에 ( 端午 节 / 단오 절)를 축하하기 위한 특집으로, ' 기원 / 祈 이라는 이름의 중국전통의 뤄신우( 洛神舞) 를 특별한 조명시설을 갖춘 물 속에서 특수촬영, 방송해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허난성 위성TV방송측은, 이 단오절 특집을 위해 무려 26시간에 걸친 사전 준비와 반복촬영으로,천상의 선녀가 수중으로 강림해 춤을 추는 장면을 재현해 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방송은 어제 12일 저녁 프라임타임의 단오절특집방송에 온 에어되면서, 웨이보등에서 찬탄이 이어지면서 오늘 까지 바이두의 주요뉴스로 랭킹되기도 했다. 허난성 위성TV 단오절 특집 무용 영상으로 보기 / https://haokan.baidu.com/v?pd=wisenatural&vid=5136530572230271089 클릭 말 그대로 유영이다. 수족관에서 벌어지는 춤사위라? 신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방안을 잘 찾아냈다 싶다. 중국의 예술이 갈수록 신선한 매력을 더하고 있다. 중국을 보면 문화란 무엇인가를 새롭게 생각하게 된다. 문화란 무엇인가? 사람들의 만드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고 좋아하면 자연스럽게 문화가 된
신화사가 봄 날이 완연한 신쟝 자치구의 성도인 라싸의 포탈라궁을 찾은 , 국내 관광객들의 싱그러운 사진을 촬영해 어제 23일 보도했다. 중국은 현재 5월 1일 노동절 연휴를 앞두고 있다. 올해 노동절 연휴는 5월 1일부터 5일까지 닷새동안의 연휴로 시행되면서, 벌써 국내 유명 관광지에 대한 고속철 표가 매진되는 등, 지난 춘지에 연휴에 이어 중국의 내수경제를 끌어올릴 수 있는 막대한 내수소비가 일어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중국은 현재 , 노인층보다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우선 코로나19 자국산 백신을 접종중인데 4월 20일 현재 약 2억 명이 접종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국방역당국은 활동량이 많고 전염력이 높은 젊은 층 ( 18- 40세)에 대해 먼저 접종함으로서, 이외의 연령계층에 대한 감염력을 감소시킨다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다. 이에 따라 이미 접종을 완료한 젊은 세대들은 마스크착용없이도 올해 노동절연휴를 즐길 수 있게 됐다고 신화왕은 전했다. 한편 신화왕은 이 사진기사의 해설에서, 지난해 2020년 시짱자치구를 찾은 국내 관광객수가 약 3,505만 명이며, 이로 인한 내수 관광수입이 366 억 4천 만 위안 ( 한화 환산 약 6조 3천억 원 ) 에 달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