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업만이 한국을 살릴 수 있다.” 한국 경제인협회의 회장을 맡은 이병철은 이렇게 판단했다. 협회 회원들의 논의 결과도 같았다. 이 같은 내용은 즉시 박정희를 수뇌로 한 혁명정부에 전달됐고, 채택됐다. 군인들의 장점은 별다른 게 아니었다. 빠르게 결정하고 대단한 추진력을 보였다. 일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병철과 경제인협회 회원들은 미국과 일본을 찾아 우리 중공업 산업 부흥 계획을 알리고 투자를 요청했다. 하지만 토끼가 마음을 고쳐 먹는다고 호랑이가 될까?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해외의 시각도 그랬지만, 내부의 문제도 많았다. 무엇보다 이병철 수준의 경영을 이해하는 한국 경영인도 드물었다. 이병철의 자서전에는 이런 사례가 있다. “자금이나 기술 면에서 난처한 사람이 생기면 일본의 경제단체나 개인에게 연결시켜 주고 미국이나 구주(유럽)에도 알선하여 여러모로 서로 협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중에는 경영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없고 겉으로만 공장건설 계획을 내세울 뿐, 구체적으로는 아무런 준비도 없는 한심한 사람도 있었다. 중공업에 참여하겠다는 사람이 있어 일본에 동행하여 가와사키川崎 제철 사장을 소개해 주었다. 그러나 ‘도대체 이야기가 되지 않으
5.16 군사 정권의 국정 운영의 핵심은 하나도 경제 건설, 둘도 경제건설이었다. 그 뒤가 바로 안보였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정권세력은 ‘과감’이라는 군사정권을 특징을 그대로 살렸다. 각종 경제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과감하게 실천했다. 사실 어떤 계획도 실천보다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훌륭한 계획이라도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물론 좋은 결과를 위해 좋은 계획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고려 없이 각종 이상만을 담은 실천할 수 없는 계획은 이미 좋고 나쁨의 평가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선과 색을 넣으면 그림은 지저분할 수밖에 없고, 완성될 수 없는 이치다. 바로 4.19 혁명 정권의 한계였다.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순수한 국민의 힘이었다. 탱크와 총에 몸으로 맞섰던 일반 학생 국민들의 용기였다. 그러나 그 혁명으로 정권을 얻은 시민 정부는 너무나 무력했다. 수많은 주장들이 서로 맞섰고, 양보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거리로 나서 시위를 했다. 학생들은 학생대로, 공장의 공원들은 공원대로, 심지어 경찰도 경찰대로 시위를 했다. 어느 한 곳 옳지 않은 주장이 없었고, 그래서 어느 하루 혼란하지
한국 사회에도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병철은 협상의 달인이었다. 그는 협상을 해 원하는 것을 반드시 얻어냈다. 한국 정부는 물론 일본, 독일 등 외국 정부의 지원도 이병철은 협상을 통해 이끌어냈다. 사실 한국에서는 ‘고 이병철 회장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가?’를 놓고 단순히 “정경유착을 통해서”라고 답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이는 큰 오해다. 무엇보다 정경유착 부분만 봐도 각 시대마다 이병철 보다 더 정권에, 권력에 유착된 이들이 많았다. 하지만 모두가 현재의 삼성보다 성공하지 못했다. 사실 정경유착이라는 게 그렇다. 한국같은 민주 사회에서 10년 이상을 가는 권력은 없다. 이승만, 박정희가 장기 집권을 했지만 어느 누구도 50년을 넘지는 못했다. 그러니 정경유착은 반드시 말로가 비참했다. 정권이 바뀌었는데, 전 정권과 유착을 했던 이들이 새로 정권을 잡은 이들의 눈에 곱게 보일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병철은 시대를 넘어 매 정권마다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승만 정권은 결국 당대 이 땅에 있던 은행 5곳의 지분을 이병철의 삼성에 넘겼다. 이어 4.19 혁명에 의해 ‘부정축재자’로 몰려 탄압을 받았지만, 이병철은 당당했다. 당시 하늘의 새도 떨어뜨
이병철이 김포 공항에서 청년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엉뚱하게도 명동의 메트로 호텔이었다. 그곳에서 이병철은 가족과 통화를 한다. 가족에게 우선 자신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그 곳에서 박정희 혁명정부 최고회의 부의장을 만나 담판을 한다. 당시 상황은 이렇다. 이병철이 4.19 혁명정부의 전횡에 낙담해 일본에서 유유자적을 하고 있을 때 4.19혁명이후 혼란한 사회를 안정시키겠다며 1961년 5월 16일 군사 혁명이 일어난다. 혹자는 정변이라고도 한다. 4.19 혁명이 일어난지 불과 1년만의 일이다. 사실 이병철의 자서전에도 고백하고 있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의 갑작스런 붕괴이후 한국은 국정 운영의 주체가 없었다. 도심에서는 경찰과 학생, 노동자들이 각자 자신들의 주장을 하며 시위를 벌였다. 나라가 온통 주장뿐 이었다. 군사 혁명 정부는 빠르게 나라를 안정시켰다. 국민들의 불만도 빠르게 잠재웠다. 그 중 하나가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처벌이었다. 4.19 혁명 정부 역시 국민들의 욕구불만을 덜어주기 위해 이병철을 부정축재자로 몰았다. 이병철은 당당히 “말도 안되는 세금을 부과하고 그 것을 내지 못했다고 부정축재자로 모는 게 문제”라고 맞섰다. 그
‘이병철은 화가다. 하얀 도화지에 연필 하나로 세상을 그려낸다.’ 호암 이병철의 생을 연구하다 얻는 생각이다. 이병철은 창조자다. 요즘 많은 이들이 혁신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혁신가 기존에 것을 새롭게 바꾸는 데 그친다. 반면 창조자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 낸다는 게 다르다. 이병철은 그런 창조적인 사업가였다. 하얀 도화지 위에 하나씩 그림을 그렸다. 그가 화가 이상인 것은 화가의 그림은 그림에 머물지만, 이병철이 그린 그림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청사진이었고, 현실에서 구현됐다. 그가 그려낸 것들은 세상에 가장 돈을 잘 버는 기업으로 살아남았다. 한국이라는 가난한 나라의 조그만 마을의 기업에서, 한국 제일의 기업으로, 이어 아시아를 넘어 미국의 기업들과 당당히 세계 1,2위를 다투는 기업이 됐다. 왜 이병철이었을까? 그 수많은 한국인 가운데 왜 하필 그였을까? 이병철은 무엇이 달라서 가능했을까? 울산비료공장 건설에는 그 비밀의 일단이 숨어있다. 한국 울산비료공장은 한국에서 공장을 지어 ‘세계 최대’라는 말이 처음 나온 곳이다. 본래 이승만 대통령시절 이병철이 기획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4.19 혁명이 났고, 곧 5.16 혁명이 났
“우리 사회의 혼란상은 형언을 절하는 것이었다.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지는 나날이 계속 되었다. 세상은 온통 데모병에 걸려 사회질서를 지키는 파수꾼인 경찰관마저 데모에 나서는 판국이었다.” 1960년 4.19 직후 한국 사회에 대한 이병철의 묘사다. 읽으면 읽을수록 당시 한국 사회가 왜 발전이 더디었는지 알게된다. “일부 정치인과 학생들이 판문점에서 남북대좌를 하자고 들고 나오고, 이에 동조하거나 이를 방조하는 정치세력이 점차 정계 일각에서 대두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부는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할 뿐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활동이 이뤄질 리 없다. 이병철은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사회 혼란의 근인은 빈곤에 있는데 경제활동의 마비로 그 빈곤이 더욱 심화되고, 그 것은 사회불안을 더욱 확대시켜 간다.” 이병철의 분석은 정확했다. 한국사회는 갈수록 혼란에 빠졌고, 정부는 민심의 분노를 가진 자들에게 돌렸다. 세무조사를 통한 세수 확대, 바로 당시 정부가 취한 행동이었다. 삼성도 걸렸다. 탈세액이 적지 않았다.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탈세에 대한 이병철의 생각이었다. 삼성 산하 15개 전 기업체가 조사를 받을 때다. “검찰에 출두하였다. 물론
‘이병철은 화가다. 하얀 도화지에 연필 하나로 세상을 그려낸다. 처음엔 눈에 보이는 세상이지만, 점차 자신의 상상 속에만 있는 것을 그려낸다.’ 호암 이병철의 생을 연구하다 얻는 생각이다. 이병철은 창조자다. 요즘 많은 이들이 혁신을 이야기하지만, 혁신가는 기업을 유지시키는데 그치지만, 창조자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을 만들어 낸다. 이병철은 그런 사업가였다. 하얀 도화지 위에 하나씩 그림을 그렸다. 그가 화가 이상이 되는 순간은 화가의 그림은 그림에 머물지만, 이병철이 그린 그림은 현실에서 살아 움직인다는 점이다. 그가 그려낸 것들은 세상에 가장 돈을 잘버는 기업으로 살아 남았다. 처음 한국이라는 가난한 나라의 조그만 마을의 기업에서, 한국 제일의 기업으로, 이어 아시아를 넘어 미국의 기업들과 당당히 세계 1,2위를 다투는 기업이 됐다. 어떻게 이병철은 그럴 수 있었을까? 그의 생애 많은 사례가 있지만 울산비료공장 건설은 가장 대표적인 예다. 한국 울산비료공장은 한국이 공장을 지어 세계 최대라는 말이 처음 나온 곳이다. 본래 이승만 대통령시절 이병철이 기획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4.19 혁명이 났고, 곧 5.16 혁명이 났다. 이병철은 자연스럽게 비료공장은
한국비료, 한국 산업에도 그렇지만, 이병철에게도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사업이다. 얼마나 이병철에게 의미가 있는지, 한국비료 이야기를 하면서 이병철의 첫마디를 들어보면 잘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비료공장을 한국비료라는 이름으로 울산에 완성시키는 데는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한국비료에 대한 이병철의 술회다. 10년의 고난, 바로 한국 현대사의 급변과 맞물린 것이다. 계속 이병철의 이야기다. “1.19혁명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붕괴, 장면(張勉) 정권하에서의 정치, 사회의 혼란은 5.16 군사혁명으로 이어진다. 이나라의 역사는 걷잡을 수 없는 격랑 속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부정축재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세금 추징이라는 명목의 재산몰수도 경험했다. 실의와 재가에서의 갈등, 이 10년은 바늘방석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이야기는 이병철의 이 10년간의 이야기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국 사회는 급속히 안정을 찾았지만, 경제는 여전히 미국 원조에 의존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원조가 영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병철은 수입대체 상품으로 제당과 모직 사업을 벌여, 값비싼 외제 상품을 대체하는 우리 상품을 내놓는다. 사회적으로는 보다
강원도 양양국제공항과 중국 6개 도시 간 정기노선을 개설할 수 있는 국제항공 정기운수권을 배분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강원도는 2일 중국 3개 항공사가 중국 6개 도시와 양양국제공항 간 정기운수권을 주 24회 배분받았다고 발표했다. 중국 3개 항공사는 상항이항공, 동방항공, 저장장룡항공 등이다. 이번에 항공사별 운수권을 배분은 상해 항공이 양양~상항이 푸동공항간 주 2회, 저장장룡항공이 양양~상하이 푸동공항간 주 7회, 양양~항저우간 주 3회, 양양~닝보간 주 3회, 양양~시안간 주 3회 등이며 동방항공이 양양~선양간 주 3회, 양양~광저우간 주 3회다. 강원도는 이번 정기노선 개설에 대해, 중국 주요도시와 양양공항 간에 전세기 운항을 통해 항공수요가 검증되어 중국 항공사가 양양국제공항에 관심을 갖게 된 것으로 이유를 분석하고 있다. 실제로 이번 정기운수권 배분도시와 양양공항 간 전세기 운항 시 탑승률을 살펴보면 2015년의 경우 양양~광저우노선 99%로 상당히 높은 수치를 보였다. 또한 2014년에 양양~상하이노선은 87%, 양양~선양노선 96%, 양양~항저우노선 95%, 양양~시안노선 99%로 높은 탑승률을 보였다. 강원도 항공해운 관계자는 “이달
서울시는 중국의 창업 액셀러레이터(지원 기관) ‘잉단’(IngDan) 한국 법인을 서울에 유치하는 것을 성공했다. 잉단은 중국의 대표적인 혁신도시 관둥성 선전에 위치해 있는 IoT(사물인터넷)과 인공지능에 특화된 창업 지원 기관으로 알려져 있다. 잉단은 린드먼아시아 인베스트먼트와 합작해 올해 3월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에 한국 법인 ‘잉단-린드먼’을 설립했다. 또한 마포구 서울창업허브에 이달 21일 사무실을 열 계획이다. 잉다-린드먼은 서울 지역을 중심으로 스타트업을 발굴했고 중국을 포함한 해외 시장 진출을 지원할 것으로 밝혔다. 또한 국내 창업자를 대상으로 중국 전문가를 초청한 창업 포럼을 열 계획으로 전해졌다. 또한 중국 선전시의 국가공인 스타트업 보육기관 ‘대공방’이 서울창업허브에서 서울시와 ‘제조업 데모데이’를 이달 28일에 개최한다. 해당 행사에서 대공방은 국내 기업들의 사업 발표 내용을 평가해 10~15개 기업에게 제품 양산비로 최대 3천만 원에 달하는 금액을 지원할 예정이다. 또한 이 중 7개 기업은 시제품 제작, 양산, 글로벌 시장 진출까지 7~8월 선전 현지에서 한 번에 해결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 밝혔다. 창업 지원 기관 잉단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