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명재상 장구령의 아내는 외롭게 홀로 묻혀야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무려 1000전의 비사(祕史)다.
장구령이 누군지부터 보자.
장구령은 당 현종(685~762) 시절 명재상이자, 문인이다. 당시 300수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는
감우4수(感遇4수)의 저자다.
“孤鴻海上來 (고홍해상래)
池潢不敢顧 (지황부감고)
側見雙翠鳥 (측견쌍취조)
巢在三珠樹 (소재삼주수)
矯矯珍木巓 (교교진목전)
得無金丸懼 (득무금환구)
美服患人指 (미복환인지)
高明逼神惡 (고명핍신오)
今我游冥冥 (금아유명명)
弋者何所慕 (익자하소모)”
“저 바다 홀 기러기는 높이 날아
혼탁한 연못엔 눈길도 안 주네
그 옆 한 쌍의 물총새
보석 나무에 둥지를 트니
나무 꼭대기, 진귀하다 해도
날오는 화살
피할 도리가 없네.
아름다운 옷, 사람의 질시를 사고
높은 명성, 귀신도 질투하는 법
아득한 하늘에서 놀아야
화살이 닿지 못한다네”
감우(感遇)는 느낀 바를 글로 쓰다. 즉 술회하다는 의미다. 말이 아니라 글로 쓴 술회다. 간단한 내용이지만 웅혼한 글체로 쓰여 듣는 이의 가슴을 울리게 한다. “아름다운 옷, 사람의 질시를 사고/ 높은 명성, 귀신도 질투하는 법” 세상사 돌아가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를 담담히 서술하고 그래서 어설프게 높은 나무에 정착하지말고 하늘 높이 고고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세상을 달관한 이의 말이다.
세상을 달관한 이 바로 장구령이다. 이 시는 무려 1000년 이상 한문을 배우고 익히는 이들 모두가 사랑하는 시가 됐다.
그게 바로 장구령이다. 그런 그가 재상을 지냈던 당은 어떤 나라인가?
중세 암흑 시대 세계 최고의 문화를 구축했던 나라가 바로 중국의 당 왕조다. 세계 최대의 권력을 구축한 왕국 ‘당’(618~907년), 얼마나 번성했는지, 밤이 없는 도시, ‘불야성’(不夜城)이라는 말이 만들어진 게 바로 이때다.
중국에서 가장 문화와 경제가 번성했던 왕조다.
당이 가장 번성했을 시기, 유럽은 중세 야만의 시대로 제대로 된 나라가 있다고 보기 힘들 정도다.
장구령의 당은 그 당 왕조 중에도 가장 화려했던 시기다. 당 현종의 치세가 이어졌었다.
당 현종은 당 치세의 절정을 이뤘다가 양귀비와 사랑에 빠지면서 나라를 기울게 한 황제다. 백거이의 ‘천년의 사랑’의 주인공이다.
그런 당 명재상 장구령의 아내가 쓸쓸히 홀로 죽었다.
왜 그랬을까? 장구령은 왜 아내의 죽음을 외롭게 방치했을까? 그렇게 부부사이가 나빴던 것인가?
아니다. 우선 그럼 우리는 1000년이 지나 어떻게 장구령의 아내가 홀로 죽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최근 그녀의 무덤이 발굴된 덕이다.
장구령 아내의 무덤이 최근 중국에서 발굴돼 공개됐다. 무덤의 주인공은 성은 동(董)이요, 이름은 소용(韶容)인 귀부인이었다. 장구령의 이야기는 역사 기록이 많지만, 그의 아내 동씨 부인의 기록은 거의 없다.
이번 무덤의 발굴은 그래서 더 관심을 끌었다. 무덤에서는 그녀를 위한 제문과 그녀가 사용했던 생활용품 등의 부장품이 나왔다.
귀족의 묘답게 웅장했고 잘 꾸며졌지만, 당 왕조의 귀부인의 묘라고 하기에는 너무 조촐한 모습이었다.
서적과 거울 등 귀부인의 생필품이 전부였다. 정말 귀중한 자료는 그녀의 공덕을 적은 기록이다. 그 기록은 당대 장구령의 상황을 엿보는 귀중한 사료가 된 것이다.
무엇보다 장구령 아내의 무덤이 아내 홀로 동씨 일가 무덤 속에 발굴됐다는 점이다. 당대 재상으로 천하의 ‘만인지상, 일인지하’의 권력을 지닌 이의 아내 무덤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특이한 것이다.
동양에서는 부부라면 합장묘를 쓴다. 첨단 IT 시대의 오늘날에도 묘를 쓰는 경우라면 부부는 합장묘를 쓴다.
그런데 당 황조의 재상의 아내가 따로 무덤을 썼다니?
기록에는 장구령이 말년에 황제의 신임을 잃으면 유배 생활을 한 기록이 아내의 입장에 묘사돼 있었다.
당 현종의 몰락은 양귀비가 원인이요, 안록산의 난이 결정적 계기가 된다.
장구령은 일찌감치 당 현종에게 안록산의 난을 경고했던 인물로 유명하다.
“안록산은 이리의 새끼와 같아서 좀처럼 길들일 수 없으며, 그의 얼굴빛에는 반역할 상이있으니, 신은 마땅히 죄에 따라 안록산을 죽여서 후환을 끊으시길 청합니다.”
736년도의 일이다.
당시 안록산은 군을 이끌고 거란족 정벌에 나섰다가 대패했다. 역사는 안록산이 적을 너무 가볍게 보고 경거망동으로 군을 이끌어 대패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장구령은 이 일을 중시해 안록산을 처형해야 한다고 청한 것이다.
현종은 장구령의 조언을 듣지 않았다. 점차 장구령을 멀리했고 결국 안록산의 난을 맞아 당의 성세에 종지부를 찍는다.
장구령의 출생 시기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정설이 673년 태어나 740년에 사망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설은 678년 태어났다는 설이다. 사망 연도는 740년으로 분명한 기록이 있다. 소주(韶州) 곡강현(曲江縣) 출생에도 이견이 없다.
702년 과거시험 진사에 급제해 정계에 발을 들인 장구령은 승승장구해 733년 당대 재상인 중서시랑까지 오른다. 재상으로서 부패 척결과 과거제의 실질성을 높이려 힘썼다. 당 현종의 사치를 막는 동시에 변방 군권을 가진 절도사의 힘을 억제하려 노력했다.
지방관들의 세금착취를 방지하기 위해 세금 수납 기록을 중앙 조정에서 바로 검토하도록 제도를 개선하였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이임보의 등장으로 물거품이 된다. 이임보와 대립으로 장구령은 정치생애에 위기가 찾아온다. 이임보가 우선객이라는 인물을 재상으로 천거하자, 장구령은 반대했다. 결국 이의 뜻대로 됐고 장구령은 736년에 상서우승상으로 직을 바꾸지만 곧 지정사에서 파직되었다.
재상에서 물러난 뒤 장구령은 자신이 천거했던 감찰어사 주자양(周子諒)으로부터 탄핵을 당하여 형주 장사로 강등된다. 장구령은 740년에 병으로 사망하여 형주(荊州) 대도독으로 추증되었고, 문헌(文獻)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안록산의 난이 755년 발생하니, 장구령 사후 15년 뒤의 일이다.
그럼 장구령의 아내는 왜 남편과 함께 묻히지 못하고 따로 친가 분묘에 묻혀야 했을까? 여기에는 장구령의 롤러코스터 같았던 관직 생활과 연관이 깊다.
당의 관직은 흔히 ‘환유’(宦游)라 했다. 다양한 지방을 떠돌아 다녀야 한다는 의미다. 무엇보다 고향을 피하는 게 원칙이었다.
고향 출신의 부임해 지방 행정을 하다 보면,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자연히 지인들을 챙기게 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 조치다.
당의 제도는 이처럼 엄격했다. 장구령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평생을 부임지에 맞춰 유랑 생활을 해야 했다.
다만 이 때 부인은 남편을 따라 부임지로 가는 게 일반적인 일이었다.
장구령의 부인 동씨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장구령과 동씨 부인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동씨 부인의 외로운 죽은 바로 이와 같은 당나라 관직제도의 장구령이 겪은 정치 풍파와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몸이 약했던 동씨 부인의 사연이 숨어 있다는 게 중국 학자들의 결론이다. 장구령이 강등돼 지방관을 지낼 당시 몸이 약하던 동씨 부인의 병이 도졌고, 결국 남편을 따라 지방으로 내려가지 못한 채 장안에서 외롭게 숨지고 말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1000년의 비사는 이렇게 어두운 무덤 속에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당 명재상 장구령의 화려한 권력의 뒤안길에 감춰졌던 슬픈 이야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