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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비료와 이병철의 10년의 고난 - 지난한 과정의 시작

한국비료, 한국 산업에도 그렇지만, 이병철에게도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사업이다.

 

얼마나 이병철에게 의미가 있는지, 한국비료 이야기를 하면서 이병철의 첫마디를 들어보면 잘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면, 비료공장을 한국비료라는 이름으로 울산에 완성시키는 데는 1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한국비료에 대한 이병철의 술회다.

 

10년의 고난, 바로 한국 현대사의 급변과 맞물린 것이다. 계속 이병철의 이야기다.

 

“1.19혁명에 의한 이승만 정권의 붕괴, 장면(張勉) 정권하에서의 정치, 사회의 혼란은 5.16 군사혁명으로 이어진다. 이나라의 역사는 걷잡을 수 없는 격랑 속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부정축재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세금 추징이라는 명목의 재산몰수도 경험했다. 실의와 재가에서의 갈등, 이 10년은 바늘방석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이야기는 이병철의 이 10년간의 이야기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국 사회는 급속히 안정을 찾았지만, 경제는 여전히 미국 원조에 의존을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원조가 영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병철은 수입대체 상품으로 제당과 모직 사업을 벌여, 값비싼 외제 상품을 대체하는 우리 상품을 내놓는다.

사회적으로는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생필품을 싸게 구할 수 있었고, 이병철 개인으로는 큰 돈을 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것으로 한국 경제의 재건이 이뤄지기는 너무나 미약한 일이었다. 이병철은 1958년 한국경제재건연구소를 만든다. 삼화빌딩에 150평짜리 사무실도 냈다. 이병철이 회장이었고, 홍성하(洪性夏)씨가 간사장 직을 맡았다.

홍성하씨는 일본 중앙대학을 졸업한 뒤 한국 독립과 함께 제헌국회 국회의원을 지낸 인물이다. 국회 경제재건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모임에는 당대 이승만씨의 양아들을 자청했던 정치인 이기붕(李起鵬)씨 등 각계 각층의 당당한 인물들이 참여했다.

이병철이 비료 공장 건설의 꿈을 가진 것은 이 때의 일이다. 당시 한국은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다. 농업생산은 해마다 늘었고, 비료의 소비역시 해마다 늘었다.

한국 정부는 미국 지원을 받아 비료공장을 지었지만, 총 생산량은 6만t에 불과했다. 그러나 1961년 한국 비료 소비량은 이미 30만t에 달했다. 5년 뒤인 1966년에는 40만t에 이를 것으로 추산됐었다.

‘35만t 정도는 생산해야 한다. 비료도 암모니아계가 아닌 비소계의 비료가 한국 토양에 더 적합하다.’ 이게 바로 이병철의 생각이었다. 당시 35만t은 한국 전체 비료 생산의 6배 가량에 달하는 수치였다. 이병철은 그래서 수출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

문제는 당시 이런 공장을 짓는 4000만~5000만 달러 정도가 든다는 점이다. 한국 정부로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금액이었다.

이병철은 아무리 고민해도 이돈을 마련하기 힘들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이병철은 마음도 정리할 겸해서 1959년 늦가을 일본을 찾는다.

사실 이 때부터 이병철은 매년 겨울을 일본에서 지내는 습관이 생긴다. 소위 이병철의 ‘도쿄구상’이라는 것이다. 일본에서 다양한 분야에 경제 전문가들을 만나고, 국제사회 주요 정보도 얻으면서 사업을 구상하고,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 처음이 바로 1599년 늦가을의 일본 방문이었다. 당시 이병철은 미국을 들러 일본 도쿄에 들려 새해를 맞는다.

1960년 두 번째 일본행에서 이병철은 비료공장 자금의 해법을 찾는다. 호텔에서 본 경제대담 프로가 결정적인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1960년 1월1일 새해를 도쿄 제국호텔에서 보내고 있을 때였다. TV에서 경제, 사회, 군사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이 나와 대화를 나눴다. 군사문제에서는 핵무기가 사용될 것인가의 여부에 화제가 모아졌고, 경제 문제에서는 미소간의 경쟁, 과연 소련의 경제가 미국 경제를 능가할 수 있나 없나는 것이 토론의 중심ㅇ었다. 당시 믹국경제는 연3% 정도의 성장이었는데, 소련은 78% 정도의 성장이어서 언젠가는 미소의 경제력이 역전될지도 모른다는 우려르 자아내기도 했던 무렵이었다....”

이병철은 대담과정에서 한 전문가의 발언을 통해 미국이 국제사회에 선진국들이 중심이 돼 후진국에 원조를 해주는 제도를 발의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산하 개발원조그룹(DAG)을 가르키는 말이있다.

바로 귀국한 이병철은 이승만 대통령까지 만나 해외 원조를 받아 비료 공장을 짓겠다는 계획을 밝히고 허락을 받는다.

“이 대통령은 달러를 쓴느 일이라면 극히 적은 액수이더라도 직접 결재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로서는 거액인 4천만에서 5천만 달러에 이르는 거액의 차관계획을 선뜻 승낙해 주어ᅟᅩᆻ던 것이다.

이병철은 차관도입을 위해 바로 유럽으로 향한다. 과연 거액의 차관을 얻을 수 있을까 마음 졸이며 떠났지만, 의외로 손쉽게 이병철은 차관을 얻는다. 걱정했던 일을 손쉽게 마무리한 이병철은 느긋한 마음에 로마 여행까지 즐긴다.

하지만 진작 큰 어려움은 한국 내부에 있었다. 4.19 학생 혁명이 나서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했던 것이다. 지지한 10년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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