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다는 게 무엇인가? 하나의 사물을 아는 방법은 본래 두 가지다. 하나는 밖에서 그 경계를 아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안에서 그 경계를 아는 것이다. 경계의 선은 분명 하나지만, 둘의 인식 방식은 극과 극이다. 안다는 건 그런 것이다. 안에서 밖에서 모두 아는 게 진정 아는 것이다. 안다는 뜻의 한자도 두 가지다. 하나가 지(知)요, 다른 하나가 지(智)다. 네이버 사전에 따르면 지(知)는 ‘알다’, ‘깨닫다’, ‘들어서 알다’ 등의 뜻이다. 반면 지(智)는 ‘슬기롭다’, ‘사물의 도리를 알다’, ‘꾀’, ‘모략’ 등의 뜻이다. 마치 지(知)는 형이하학적이며 지(智)는 형이상학적으로 들린다. 또 그렇게만 보기에, 묘하게 지(智)에는 모략, 꾀라는 부정적인 의미도 담겨있다. 한자에서 지(智)가 지(知)보다 오래된 글자다. 지(智)는 갑골자가 있지만, 지(知)는 없다. 지(知) 후대인 청동기 금문에서 등장한다. 묘하게 복잡한 글자가 단순한 자보다 더 먼저 등장한 것이다. 그래서 학자들은 지(智)와 지(知)가 한 글자라 본다. 금문에 등장하는 지(知)는 화살 시(矢)과 말하는 입 구(口)의 조합이다. 갑골자 지(智)의 자형은 좀 복잡하다. 일부 글자는 화살이
느낀다는 건 마음이 이뤄지는 것이다. 손과 발 피부로 눈으로 만져서 보아서 느끼는 것은 마음속에 느껴진 것들이 그려지고 이뤄지는 것이다. 느낌은 그런 것이다. 마음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손이나 발이 아닌 눈이나 코가 아닌 마음이 이뤄져야 하는 것이다. 동물의 느낌이 아닌, 가장 인간다운 느낌이 바로 감이다. 가장 인간다운 글자 단어가 바로 감인 것이다. 그래서 느낌의 감(感)은 갑골문은 청동기 시대의 금문에 와서야 발견된다. 마음 심(心) 위에 이룰 성(成)이 있는 모양이다. 이룬다는 게 무엇인가? 무기를, 집착을 내 욕망을, 내 주장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 것을 마음으로 하면 비로서 느낌이 온다. 내 무기를 내려놓고 내 집착을 버리면 비로소 주변의 풀벌레 소리가, 새소리가, 남의 말이 들린다. 신선한 바람이 느껴지고 나를 둘러싼 자연, 나 같은 것 혹 나와 다른 것들이 내 눈길에 내 후각에 내 촉각에 내 미각에 나의 피부에 접하고 있음을 비로소 느끼게 된다. 그 느낌, 바로 감(感)이다.
성공이란 무엇인가? 이룬 것이다. 뭔가 이룬다는 건 무엇인가? 내려놓는 것이다. ‘이제 됐다’는 것, 내려놓는 것 바로 이룬 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완성의 경지다. 일찌감치 갑골자를 썼던 동양의 선인들이 본 경지다. 이룬다는 건, 시작이 아니다. 완성이요, 끝이다. 비로소 내려놓는 것이다. 갑골자 이룰 성(成)은 전투를 끝내고 큰 창을 내려 세워 잡고 있는 모습이다. 싸움의 결과는? 나오지 않는다. 큰 창이 쓰러지지 않은 걸 봐서 최소한 지지는 않았다. 큰 창을 내려 세운 모습이 사뭇 장엄하다. 이겼거나, 휴전한 것이다. 창을 내려 세워 잡은 모습에서 지지 않고 전쟁을 끝낸 병사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실제 춘추시대 문서 가운데는 이룰 성(成)을 휴전하다는 뜻으로 쓴 게 확인된다. “所以为成而归也。”(소이위성이귀야: 그래서 휴전을 해 되돌아가다.) 여씨춘추의 한 대목이다. 이긴 것을 성공으로 본 게 아니라, 지지 않은 걸 성공으로 본 것이다. 성공의 확률이 확 올라간다. 바로 손자가 이야기 한 ‘백전불태’(百戰不殆: 싸워서 위태롭지 않다)의 경지다. 진정한 ‘백전백승’(百戰百勝)이다. 지지 않아서 이긴다. 최고의 효율적인 승리다. 이기는 데 필요
입구가 셋 모인 게 품격의 품(品)이다. 세 입이 하나 같이 말해준다는 의미다. 평판은 그렇게 서로 다른 입들이 좋다, 나쁘다 등을 한 입처럼 같이 말해주는 게다. 평판이 쌓이면 그게 품(品)이 되고 품의 격(格)이 놓아진다. 격(格)은 좀 복잡한 한자다. 입구로 들어가는 발을 글자로 형상화 한 각(各)에 나무 목(木)을 더한 글이다. 층층이 다른 나무 가지들을 가리킨다는 게 일반적 설명이다. 품격은 이렇게 만들어진 글자다. 세 입이 한 결로 말한다는 의미다. 그럼 귀가 셋이 모이면 어떨까? 세 귀가 들은 풍월일까? 입이 말하는 것을 상징한다면, 귀는 마땅히 듣는 걸 상징해야 한다. 귀를 기울인다는 의미가 강해야 한다. 하지만 귀 셋은 여전히 말한다는 의미다. 귀 셋을 기울여야 할 정도의 작은 소리, 속삭임을 의미한다. 귀를 더욱 기울인다는 의미에서 섭(聶)은 섭(聂)이라고도 쓴다. 양 손으로 귀를 모아 듣는 모습이다. 귀 이(耳)를 쓰고 ‘말하다’고 하는 게 한자의 묘미다. 입 구(口)를 쓰고 ‘듣는다’고 하기도 한다. 들을 청(听)이다. 청(聽)의 간자체다. 입으로 듣고 귀로 말하는 게 한자의 세계관이다. 말이 있어 듣고, 듣기에 말이 있는 것이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마음의 정(靜)을 얻는 것이다. 마음이 정하면, 관조할 수 있고, 관조하는 삶은 나, 자(自)와 나 같은 주변, 자연(自然)을 새롭게 인식케 한다. 나 자(自)는 나 같은 것들, 자연(自然) 속에 있을 때 가장 편하고 오래 간다. 내가 더욱 ‘나’, 자기(自己)다워진다. 고요한 삶은 일시적 욕구를 즐기게 한다. 일탈은 색(色)이다. 삶을 다채롭게 한다. 고요할 정(靜)은 그래서 멈춤이 아니다. 정지된 게 아니다. 조용한 균일한 움직임이다. 이 도리를 선인들은 일찌감치 알았다. 갑골자 정(靜)은 우물 주변의 무성한 나무들을 손으로 정리하는 모습이다. 고요함을 얻는 방법이 한자 정(靜)에 담긴 것이다. 고요는 사람의 손길로 무성한 나무를 정리해 얻는 것이다. 살아 있는 한, 고요는 그냥 오지 않는다. 우물 주변에 무성하게 자란 상념들처럼, 순간순간의 욕정과 욕망들이 교차한다. 그것을 손으로 정리해 내는 게 바로 고요함을 얻는 방법이다. 마음을 쓸어 비운다는 표현이 너무도 적절하다. 한자의 정(靜)에 푸를 청(靑)과 다툼의 쟁(爭)이 들어 있는 이유다. 푸름을 다툴 때, 비로소 정(靜)을 얻는 것이다.
모파상의 ‘여자의 일생’은 여성의 삶이 동양은 물론, 서양에서 얼마나 서글픈지, 얼마나 부조리한지 보여준다. 흔히 삼종지의(三從之義)라 했다. 어려서는 부친을 따르고, 결혼해선 남편을 따르면, 늙어서는 자식을 따른다는 말이다. 모파상의 소설도 삼종지의에 대한 서양적 진실이다. 동양은 일찍이 모계사회였다고 하는데, 갑골자로 본 여성은 너무도 일찍이 순종의 덕을 실천하는 모습이다. 계집 녀(女)는 누가 봐도 한 여성이 무릎 앞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그 여성이 아이를 안고 젖을 먹이는 게 어미 모(母)다. 계집 녀(女)에서 젖가슴이 강조됐다. 가장 단순하지만 가장 아름답고 가장 숭고한 모습이다. 재미있는 게 어미 모(母) 자형의 발전이다. 계집 녀(女)의 모습이 조금씩 사라진다는 것이다. 예서에서 어미 모(母)는 어미일 뿐이다. 계집 녀(女)의 모습이 글자 속으로 사라진다. 계집 녀(女) 발전사에 가장 서글픈 모습이 노비 노(奴)다. 여성의 팔을 비틀어 뒤로 잡아채는 모습이다. 여성을 뒤로 낚아채 마음대로 하는 게 노예다. 낯선 사내에 이끌려 낯선 곳에서 온갖 잡일을 다하며 아이도 낳아야 했던 게 노예다. 손에 이끌린 여성이다. 그 마음
불타는 초가 바로 주다. 스스로를 태워 빛을 내는 초다. 바로 주(主)의 도리다. 그래 본래의 주는 소유하지 않으며 강제하지 않는다. 그저 주변을 밝혀 어둠을 밝혀 양과 음을 구(區)하며 명과 암을 나눈다. 성경과 사서삼경이 책 한 권을 밝히는 도리를 한자 주(主)는 한 글자에 담고 있다. 한자 주(主)의 도리다. 갑골자 주는 대형 초다. 불타는 초다. 나뭇가지 위로 춤추는 화염(火焰)과 화심(火心)히 보인다. 화염은 광(光)의 시작이다. 빛은 주의 발현이다. 한자 주(主)는 스스로 주인 됨을 주장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태워 밝힐 뿐이다. 소유하지 않고 밝혀 있음과 없음을 구분해 낼 뿐이다. 사실 소유(所有)가 본래 그렇다. 그저 거기 있음을 밝히는 게 바로 소유다. 여기서 소유하지 않는다고 함은, 본래의 소유를 할 뿐, 요즘의 의미처럼 법적 권한을 갖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주는 그래서 큰 학문의 시작이다. 대학의 도다. 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 데 있다. ‘대학지도 재명명덕’ (大學之道 在明明德) 모든 게 스스로를 태워 주는 주(主)의 덕이다. 내가 없을 때 비로소 진정한 내가 있다 바로 노자의 도(道)다. 진정한 주인(主人)의 도다.
나무가 나무인 이유는 풀이 있기 때문이다. 역으로 풀이 풀인 이유는 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동물이 동물인 이유는 식물이 있기 때문이요, 꽃이 꽃인 이유는 풀이 있어 꽃과 풀이 다른 탓이다. 자연의 법칙이다. 서로 달라 조화롭고 서로 달라 화음을 낸다. 자연의 법칙, 그대로가 적용되는 게 한자의 세계다. 한자의 세계는 평등하다. 상호의존적이다. 한자 하나하나가 자신의 뜻을 갖고 문장 속에서 그 뜻을 발현한다. 한자의 뜻은 한자와 한자의 관계 속에서 더 분명해진다. 문장 속에 또 다른 한자와 호응해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차이는 필요할 때만 드러난다. 예컨대 ‘간(干), 우(于), 천(千)’ 모두 비슷하다. 차이가 적다. 그저 기울기가 다르고 꼬리 모양이 다를 뿐이다. 하지만 의미는 서로 완전히 다르다. 간은 ‘줄기’, ‘’행하다‘는 뜻이고 우는 ‘~에’, ‘~보다’는 조사다. 천은 '10의 100배'요, '100의 10배'다. 생김새만 놓고 문장에서 한 글자만 쓴다면, 간을 우 같은들 우가 천 같은들 아무런 문제가 없다. 한자는 이렇게 평소에 구별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한 문장에 동시에 간이나 우, 우나 천 등 두 글자 이상 쓰이는 경우, 간은 다시 간이요
같은 것을 비교해 다른 것을 알아내는 게 차별의 차(差)다. 같은 곡물을 비교해 둘의 다름을 보는 모양이다. 갑골, 금문 등에 등장하는 구(區)는 오늘날의 글자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작은 물건들을 하나의 경계로 묶어낸 모습이다. 일부 글자는 한 선을 꿴 모습도 있다. 즉, 구별의 구는 공통점을 갖는 여러 물건을 한 데 묶은 모습이다. 자연스럽게 각각의 공통점이 다른 무리들이 만들어지는 데, 그 그룹과 또 다른 그룹의 다름이 구별(區別)이다. 바로 이점에서 차(差)와 구(區)는 완전히 다르다. 간단히 말해 출발이 다르다. 차는 같은 것에서 출발하고, 구는 다른 것에서 출발한다. 모두가 다른데 한 가지 공통점, 혹 대표적 특징으로 묶이는 한 무리를 만드는 게 바로 구다. 구별은 그렇게 공통점과 특징으로 묶인 그룹 간에 이뤄지는 것이다. 차는 같은 것에서 떼어내는 것이고, 구는 다른 것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그래서 차별은 우리 가운데 있고, 구별은 너희 가운데 있다. 차별은 조직을 해치고 구별은 조직을 단합시킨다. 중요한 것은 차별이나 구별이나 그게 필요할 때만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만물은 어찌 구별하면 하나의 무리이기 때문이다. 지구의 만물은 우주 속 또
참새는 목이 짧아 참새요, 황새는 목이 길어 황새다. 참새가 목이 길면 참새가 아니고, 황새가 목이 짧으면 황새가 아니다. 황새가 목이 길다고 자르면 살지 못하고 참새가 목이 짧다고 늘이면 역시 살지 못한다. 생물이 그렇다. 서로 다르다. 본래 그렇다. 같은 새라도 참새와 황새가 다르고, 사람이라도 너와 내가 다르고, 너의 그가 다르다. 세상 만물은 다르기에 서로 어울려 산다. 다르기에 조화가 생기고, 만물이 있어 생동이 있다. 다르다는 건 평소 눈에 띄지 않는다. 참새와 황새가 다르다는 걸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걸 너와 내가 다르다는 걸 평소 굳이 강조할 필요가 없다. 굳이 강조할 필요없이 다르기 때문이다. 다르기에 달리 살고 달리 살기에 조화롭되, 간여하지 않는다. 다른 게 강조될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것만 빼고 같을 때다. 모든 게 같을 때 비로소 다름이 두드러진다. 모두가 같기에 굳이 차이(差異)를 찾는다. 차이(差異)의 차(差)라는 게 그렇다. 같은 것끼리 비교해 다른 것이다. 갑골자의 차(差)는 벼(禾) 가지 두 개를 든 손이다. 훗날 하나를 들고 기구로 재는 모습의 글자 형태도 나온다. 자로 벼의 크기를 재는 것이다. 같은 벼의 다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