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和而不同’, 친구는 조화의 대상이지, 또 다른 내가 아니다. 친구만이 같은 오른손을 내밀 수 있다. © Myriams-Fotos, 출처 Pixabay사람은 누구나 하나의 오른손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같은 오른손을 내밀 수 있는 이는 내가 아닌 친구뿐이다. 친구가 아니면 내게 손을 내밀어 주지 않는다. 이렇게 다르기 때문에 우린 친구와 같은 한가지 일을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게 중국의 대화 모양이다. 세계에서 사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독특한 것이 중국인들의 거실 배치다. 무협 영화를 보면 자주 등장하니 누구나 한 번쯤은 봤을 듯싶다. 중국인 거실에서 차를 마시는 탁자는 마주 보지 않도록 구성돼 있다. 두 사람이 차를 마시면서 한 방향을 보고 이야기하도록 구성돼 있는 것이다. 대화는 상대방과 같은 곳, 같은 비전을 가지고 해야 한다는 함의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실생활에서 서로 대화가 잘 안될수록 얼굴을 맞대게 된다. 중국 거실 배치의 묘미는 얼굴을 맞대지는 않지만 귀는 더욱 가까이 둔다는 것이다. 같은 방향을 보고 이야기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귀를 더 가까이 상대방 입에 두게 된다. 둘만의 은밀한 비밀 이야기가 하기 쉽다는 의미다. 서로 눈을 마
친구가 뭘까? 한자적 의미는 정말 단순 명쾌하다. 힘 쓰는 오른 손을 보태주는 것이다. 내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 geralt, 출처 Pixabay벗, 참 예쁜 우리 말이다. 그게 꼭 우리 말이어서만이 아닐 것이다. 영어도 친구를 버디(Buddy)라고 하는 데 뭔가 발음상 친구의 가까움을 보여주는 인연이 있는 듯 싶다. 표음문자들은 가장 기본적 발음의 정감에서 닮은 점이 있다. 예를 들어 사람이 세상에 나와 처음 접하는 가족, 엄마에 대한 호칭에는 '으므' 라는 가장 기본적인 입 모양과 모음이 들어가 있다. 엄마, 모(母), mutter, mother 등이 그 예다. 그래서인지 우리 말 벗이 그 어원을 따지면 인도에서 왔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우리의 벗의 옛 발음은 '벋 '데 인도의 물을 뜻하는 고어가 벋, - 현대어의 발음을 찾아보니 '빠니'라 한다 -이고 이 인도어는 유럽으로 건너가 몸을 의미하는 바디(Body), 친구를 의미하는 버디(Buddy) 등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물 같은 게 친구라는 의미여서 그렇다고 한다. 그럴 듯 해 보인다. 또 벋은 '벋어나가다'의 의미로 친구란 사교의 의미가 담겨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래도 '친구란 무엇인가?'하는
아버지의 어깨는 세상의 무게다. © geralt, 출처Pixabay 작가 김정현은 지난 1996년 소설 아버지를 출간해 큰 인기를 모았다. 췌장암 말기로 사형선고를 받은 한정수라는 50대 부친의 생의 마지막 5개월간의 이야기다. 주인공 한정수는 28세 인생의 절정을 맞는다. 늦깎이 대학생이 되면서 같은 해 행정고시에 붙었다. 비록 지방대였지만 행정고시에 합격하면서 사회의 주목을 받는다. 언론 매체들이 가난에 굴하지 않고 공부해 대학 입학과 함께 행시합격을 이룬 정수의 사연을 대서특필했다. 그런데 작가는 이게 김정수의 발목을 잡는다고 꼬집는다. 가난에 굴하지 않았다는 것은 집안이 별 볼 일 없다는 것, 지방대라는 것은 학연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는데, 언론 덕?에 이 같은 사연이 만천하에 알려진것이다. 문제는 이때부터다. '노력' 빼고는 별 볼 일 없는 정수는 세상의 부조리에 직접적인 타격을 받는다. 흙 수저는 노력을 해도 안되는 것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정수는 공무원 발령을 받고 정말 각고의 노력을 했지만, 항상 그저 그런 평가만 받는다. 사실 보직부터 본래 힘 있고 학벌 좋아 공무원이 된 이들과 달랐다. 한직을 떠돌아서는 성과를 내기란 애초
갑골자 아비 父는 한 손에 무기, 매를 든 모습이다. 그것은 지키기 위한 것이다. © stevepb, 출처 Pixabay 예로부터 동양에서 아버지의 전통 모습이 '엄부'다.당송 8대가로 유명한 소동파의 부친도 엄부였다. 부친 소순(蘇洵) 역시 당송 8대가 중 한 명인 문장가였다. 어려서 얼마나 엄했던지 훗날 노인이 된 소동파는 꿈속에서 본 부친의 모습을 작품에서 남겼다. 꿈에서 소동파는 어린아이였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부친이 읽으라 했던 사기를 다 읽지 못하고 잠들어 부친을 기다리며 떨었다" 그러다 잠을 깬다. 어린 시절 얼마나 부친이 무서웠으면 그랬을까?개인적으로도 어린 시절 부친은 참 무서웠다. 가끔이지만 한번 매를 들면, 온 가족이 걱정이 돼 말려야 했을 정도다. 부친에게 야단을 맞은 날은 며칠 동안 악몽을 꾸기도 했다.사실 아비 부에는 분명 매를 든 모습이 있다. 하지만 커서 직접 아버지가 돼 보니, 갑골자 父가 매를 든 이유는 아이를 훈육하려는 이유뿐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나이가 들수록 그보다 가족을 위해 외부를 향한 투쟁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더 커졌다.사회에 진출해 사회를 대하는 자세가 홀몸이었을 때와 결혼했을 때, 또 아이를 낳은
세상에 자기 외 또 다른 생명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지게 된다. 그런데 그래서 너무 행복하다. 진정한 인간으로 완성되는 마지막 조건인지 모른다. © derekthomson, 출처 Unsplash 사회가 복잡해져 사람의 역할도 그에 따른 호칭도 참 많아졌다. 직장에서는 대리, 차장, 팀장, 부장, 학교에서는 학사, 석사, 박사, 교수 등등.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람은 누구의 친구고, 누구의 적이기도 하다. 때론 이름으로 불리고 직함으로 불린다. 그래도 유사 이래 변치 않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불리는 호칭이 있다. 아들과 딸, 남편과 아내, 아버지와 어머니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은 반드시 누군가의 아들, 딸로 태어난다. 성인이 돼 가정을 꾸리면 누군가의 남편이요, 아내다. 그리고 자녀를 낳으면 누군가의 아버지요, 어머니가 된다. 그 호칭에 따른 역할도 크게 다르다. 인생은 그 3가지 이름으로 구성됐다 싶다. 그리 보면 가장 오래 하는 것이 아들, 딸이고 가장 짧지만 가장 무겁고 힘든 게 아버지요, 어머니다. 남편과 아내는 그 무거운 것을 만들고, 나누는 역할일 뿐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는 순간은 나로 인해 이 세상에 새로운 생명이 만들어지
왜 개미는 개미로 태어났을까? 왜 그렇게 작게 태어나 하루 한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해야 하는가? 왜 그러다 너무 뜻밖에 내 발에 깔려 죽는가? 나와 개미는 무슨 업보였을까? 나무늘보는 왜 나무늘보로 태어났을까? 왜 그렇게 매일 나무에서 늘어지게 잠만 자는가? © holzijue, 출처 Pixabay무겁다. 무거운 게 '운명'(運命)이다. 씨알에 들어 열매로 발현되는 게 운명이다. 어쩌면 그 첫 열매를 맺는 게 인생이다. 나이다. 운명은 삶의 속도요, 무게다. 10대는 시속 10㎞로 살고, 10㎏의 삶의 무게를 진다. 나이 40이면 40㎞로 살고, 40㎏의 삶의 무게를 견뎌야 한다. 50이면 50㎞로 살고, 50㎏의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야 한다 싶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단다. 좀 참아보렴" 중국의 한 영화에 나오는 대사다. 가난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한 노파가 손녀 딸에게 하는 말이다. 노파에게 운명,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지고 가야 하는 것이다. 그래 몸만 피곤하면 됐지, 마음까지 피곤할 필요 없다는 의미다. 다시 말하지만, 갑골문자에서 명은 입을 크게 벌린 모양 아래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이다. 마치 확성기의 소리 나는 부분을
一切由心造:모든 게 마음에 달렸다. © surajith s, 출처 OGQ 마음의 값은 목숨이다. 네 목숨이 얼마냐? 솔직히 그건 아무도 모른다. 그 가치를 증명하는 것은 목숨 주인의 몫이다. 마음 주인의 몫이다. 자기 마음의 주인이 자기인지도 모르고 사는 게 요즘의 풍토다. 상심자가 많은 게 요즘 세태다. 소위 제 마음 하나 제대로 간수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는 게다. 그런데 이게 요즘만의 일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한자의 곳곳에 비슷한 흔적이 나타난다. 마음을 어디다 둘까? 이게 쉬운 문제가 아니다. 한자에서 마음 심 心자가 부수로 쓰일 때는 곁에 두거나 아래에 둔다. 그런데 묘하게 마음 곁에 무엇을 둬서 좋은 뜻이 드물다. 곁에서 마음을 쓰이게 하는 게 사실 좋은 게 있을리 없다 싶다.마음 심 心을 곁에 둔 한자는 대체로 사람을 근심스럽게 하거나 겁 먹게 한다. 예컨대 칼 옆에 마음을 둔 도 忉, 사람들이 모여사는 마을 옆에 마음을 둔 리 心+里 자는 모두 근심하다는 뜻이다. 마음을 방패 간(干) 곁에 두면 방해하다는 뜻의 간 忓이 된다. "이상하다, 잘못됐다"는 뜻의 괴 怪도 성낼 연 悁도 있다. 성낼 연에서 장구벌레 연(肙)은 예쁠 연 娟, 기부할 연
“그것을 봤다는 것은 누군가 죽었다는 것이다. 아니면 어쩜 이렇게 똑같을까. 분명히 봤다는 것이다. 누굴까. 누가 죽어 처음으로 자신의 심장을 남에게 보여줬을까….” 마음심(心) 자를보면 섬뜩한 전율이 인다. 산 사람의 심장은 지금도 보기 힘들다. 분명히 죽어야 보여주는 게 심장이다. 마음이다.그런 심장을 정말 너무 단순히, 너무 정확히 표현을 했다. 마음 심 心의 이야기다. 모양을 본 딴 상형자다. 심실, 심방 구조를 정확히 표현했다. 참 선인들의 인간에 대한 이해가 간단치 않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인문학적 생태만 본 게 아니라 해부학적 요소까지 담겨 있는 게 한자다. 심장은 사람 생명의 근원이요, 중심이다. 갑골자를 만든 선조들은 일찌감치 그것을 알았다.사실 사람을 상징한 신체 구조는 많다. 예컨대 스스로 자 自는 코 모양이다. 코는 내 얼굴을 남과 구분해주는 중심이다. 그 코가 남과 구분해 스스로를 보여준다고 생각해 '스스로'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성기도 생명의 근원이다. 그러나 그것은 나로 인한 새로운 생명의 근원이지, 내 생명의 근원은 아니다. 그래 없어도 사는 신체 기구다. 하지만 심장은 없으면 누구도 살 수 없다. 물론
“배움은 체득을 하는 것이다. 마음으로 깨닫고 몸으로 얻는 것이다. 몸으로 얻은 진리는 절로 행해진다. 진리를 체득하는 유일한 길이 학습이다. 학습은 바로 코칭을 받고 혼자 노력하는 길이다.” 무엇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는 배워야 안다. 그래서 배움이 어떻게 사느냐를 결정한다. '무엇을 배웠느냐'라는 것은 '무엇으로 살 것이냐'와 같은 질문이다. '어떤 수준까지 배웠느냐'라는 것은 결국 '어떤 수준의 삶을 살 것이냐'라는 것이다.그리 중요한 게 배운다는 것, 바로 학습学习이다. 그럼 학습은 어떻게 하는가? 역시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질문이다. 동양에서는 체득体得이 학습의 마지막 단계다. 체득, 바로 몸으로 얻는 것이다. 체득을 위해 하는 것이 학이요, 습이다.학은 코치를 받는것이고,습은스스로 익히는 것을 말한다.이 도리는 습의 옛 글자, 갑골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갑골문자에서 보듯 습은 어린 새의 날갯짓이다. 지도 받은 뒤 고쳐진 것을 스스로 노력해 몸이 익숙하게 하는 게 바로 학습이다. 그 최종 목적은 체득에 있다. 체득은 그래서 습득이라고도 한다. 습득, 어린 새가 지속적인 날갯짓을 해 얻는 것, 날 게 되는 것을 말한다. 날개 어깨뼈가 튼튼
“배워 아는 것은 맞다. 그러나 아는 것이 배움의 전부는 아니다. 배움은 알아가는 것보다 끊임없이 아는 것을 익혀가는 것이다.” 질문이 하나 있다. "코치는 선수를 가르치는 사람인가?"그렇다고 한다면 또 묻자. "그럼 모든 코치는 선수보다 잘 하겠네? 그럼 왜 선수가 경기를 뛰지 코치가 안 뛰고?"이쯤 되면 무슨 말인지 안다.코치는 가르치는 사람이 아니다. 코칭은 가르치는 게 아니고 잘하도록 지켜봐 주는 것이다.한국이 나은 세계 최고의 피겨스케이팅 선수 김연아만 봐도 쉽게 안다. 세상의 그 어떤 코치도 김연아보다 높은 점수를 내지 못한다. 그런데 그 김연아는 또 코치가 없으면 자기 점수를 갱신하지 못한다. 코치는 그런 것이다. 김연아를 항상 지금의 김연아보다 나을 수 있도록 만드는 사람이 바로 코치다.그게 바로 배울 학이다. 학은 실은 코칭 할 학이다. 갑골문에 그 의미가 잘 나타난다. 갑골자에서 현재 간자까지 배울 학의 변형이다. 사실 학은 교로도 읽는다. 배울 학이고 가르칠 교다. 아쉽게도 점차 배울 학을 절반의 뜻만으로 쓴다. 서양의 코칭은 코치의 관점에서 나온 단어다. 코칭 한다고 하고, 코칭 받았다고 한다.그런데 갑골문에서는 배우고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