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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공업단지의 건설

본래 정말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법
엉뚱하게 더 좋은 달을 따는 경우가 있다

정말 자기 것인 것인지 알려면 버려봐라

옛 선인들이 준 충고다. 소유라는 것은 내게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니다. 소유란 내맘대로 되는 것이다. 내 것은 저절로 내맘으로 그대로 된다.

 

내 맘대로 된 것이야말로 내 것인 것이다. 그런데 그게 영원히 내 것일까? 기업은 어떻게 소유하는 것일까? 삼성그룹의 영원한 숙제는 일찌감치 선대 이병철 때부터 시작됐다. 울산비료공장은 이병철, 또 지금의 삼성에게 기업 소유권을 어찌 유지해야하는 지 끝없이 고민하게 한 주인공이다.

 

울산비료공장, 제일제당, 제일모직을 성공시킨 이병철의 회심의 작품이었다. 한국 정부도 못하는 유럽 차관까지 모두 섭외를 해놓고도 한국 국내 정치 상황의 급변으로 이루지 못했다. 경제를 중시하는 혁명정부가 들어섰지만, 이병철은 울산비료공장을 적극 추진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상만으로 간단히 이병철의 자신의 계획을 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버려졌던 울산비료공장 계획은 엉뚱한 순간 되돌아 왔다. 마치 자신의 진정한 소유주는 이병철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1963년 10월 한국에는 대통령 선거가 있었다. 혁명정부가 정권을 민간에 이양한 조치였다. 그렇게 뽑힌 대통령이 박정희였다. 혁명정부의 수뇌가 정식 대통령이 된 것이다.

 

박정희는 한국 역사에 이렇게 중심인물이 됐다. 이후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으로 나뉜다. 아쉽지만 여기서 논할 이야기는 아니다. 울산비료공장이 그 오랜 기간을 지난 이병철에게 다시 돌아온 것은 그 대통령 선거가 끝이 난 뒤다.

 

이병철은 박정희 대통령이 된 뒤 이듬해 청와대를 찾는다. 청와대는 한국 대통령이 머무는 곳이다. 청와대에서 박정희는 이병철을 환대했다. “이 사장, 이제 더 이상을 일을 피하지 마세요. 정말 큰 일을 하실 분이 정작 조용하십니다. 공약공장을 만드시면 어떨까요?” 박정희가 권했다. 이병철은 “여러 사정이...”라며 에둘러 사양을 한다.

 

다시 박정희가 권했다. “아 그럼, 전에 해보려던 비료 공장은 어떤가요?” 다시 이병철이 에둘러 사양하려 하자, 박정희가 화를 냈다. “아니 그럼 이 사장은 우리와 협조하지 않겠다는 것인가요?” 이병철은 “여러 여건이 쉽지 않다는 것”이라며 박정희를 달랬다.

 

박정희는 그 자리에서 바로 장기영(張基榮) 부총리겸경제부 장관을 부른다. 그리고 정부의 모든 지원해주라고 한다. 이병철은 일단 청와대를 물러났다. 하지만 선뜻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장기영 장관은 끊임없이 연락을 하며 이병철을 설득했다. “그 공장은 나라에 꼭 필요하다”는 게 장 장관의 소견이었다. 장 장관은 심지어 이병철의 집까지 찾아와 설득을 계속했다.

 

이병철과 장기영 장관은 일찌감치 서로 잘 알고 있었다. 이병철이 부산에서 사업을 할 때 만난 사이다. 이병철은 자서전에서 이렇게 그를 평했다. “항상 부지런하고 인정이 많고 남을 잘 도왔다. 어찌나 분주한지 주변에 그가 있는 주변에는 항상 활기가 넘쳤다.” 이병철은 장 장관이 관직에서 물러난 뒤 일주일에 한차례는 만나 골프를 치곤 했다. 장 장관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이병철은 지방 출장 도중에 듣고 차를 돌려 찾는다. “충격이 커 한동안 일을 하지 못했다.” 이병철의 고백이다.

 

장 장관은 이병철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계획만 세우면 정부가 모든 것을 알아서 하겠오.” 장 장관의 설득에 이병철의 마음도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울산비료 공장은 이병철은 공장의 규모부터 생각하기로 했다. 당시 일본에는 단일 비료 공장으로서는 최대인 연산 18만 톤을 생산하는 공장이 있었다. 소련은 이를 능가하는 30만톤 규모의 공장을 기획하고 있었다.

 

이병철은 세계 최대의 것, 36만톤을 생각했다. 이병철은 이렇게 자신의 판단을 적었다. “10년후의 동향을 내다 보아야 하는데, 10년후에는 비료가 남기는 커녕 오히려 모자란다고 예측했다. 우리나라 경작 면적과 비료 사용량을 국제 비교한 결과 얻은 결론이었다.”

 

이렇게 한국은 비료공장을 짓기로 했다. 하지만 그 게 한국이 한다고 쉽게 되는 일이 아니었다. 당장 한국 정부는 그 공장을 지을 돈이 모잘랐다.

 

 

본래 정말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법이다.

그런데 인생이 재미있는 것은 하늘의 별을 따려고 그리 노력해 결국 그토록 원했던 별은 못 땄는데, 엉뚱하게 더 좋은 달을 따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굳이 설명하자면 이병철과 울산공업단지의 경우가 그렇다. 이병철은 제일모직 성공이후 국가 재건을 위해 아시아 최대의 비료 공장을 꿈꾼다. 대부분을 외국에서 차관을 받아 짓는다는 게 기본 계획이었다. 이병철은 이를 위해 유럽을 돌아다녔고, 차관과 기술협력과 관련한 기본적인 협의를 해놓는다. 하지만 한국의 4.19혁명에서 5.16군사혁명까지 두 번의 연이은 혁명은 이병철의 비료 공장의 꿈을 좌절시킨다.

 

하지만 그 비료공장을 위한 노력이 이병철에게 무익했던 것은 아니라는 게 필자의 판단이다. 이병철은 해외 차관과 대규모 공장 건설을 위한 기술 지원 협의에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지니게 됐다. 이병철의 이 노하우가 발현된 것이 바로 울산공업단지다.

 

울산 공업단지는 한국의 경제 발전에 초석이 된 것이다. 본래 당시만 해도 군사혁명정부 내부에서는 경제개발과 관련한 두 가지 흐름이 있었다.

 

모두가 경제발전을 위해 산업화가 필요하다는 데 이견은 없었다. 다만 그 산업화로 가는 노정을 당시 한국인 대다수가 농민이라는 점을 들어 농촌 발전을 통해 공업화로 점진적으로 가자는 주장과 과감한 외자 도입 투자를 통해 바로 산업화 공업화로 가자는 주장이 양립돼 있었다. 당연히 이병철 등 경제인들의 바램은 지름길을 통한 공업화였다. 논란 끝에 채택된 것이 울산공업단지 건설이었다.

 

자서전에서 이병철은 당시를 이렇게 술회하고 있었다.

“정부는 기본 방향을 정하지 못하고 우왕좌왕했다. 나의 주장은 전자였다. 우리가 빈곤에서 하루 속히 탈피하기 위해서는 공업화를 서둘러 생산과 수출을 늘려야 한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자본의 축적이 없고 기술도 없으므로, 선진국에서 차관이나 투자의 형식으로 자본과 기술을 도입하여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 해외 차관도입을 시도 해본 경제인은 이병철이 유일했다. 울산공업단지 건설에 이병철이 핵심적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당시 한국 상황에서 필연적인 결과였다. 하지만 정부가 공업화 노선을 택했다고 해서 바로 공업단지 설립 계획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역시 구태의연한 관료주의가 문제였다. 이번에 관료들이 “공장을 전국 곳곳에 세우면 전국이 고르게 발전할 일인데, 왜 공업단지를 대규모로 조정해야 하는가?”라고 문제 제기를 하고 나섰다.

이병철이 경제계를 대신해 이렇게 설득하고 나섰다.

 

“공장입지에는 여러 가지 조건이 갖춰져야 한다. 전력. 용수 육해의 수송, 노동력 확보의 편의 등의 조건이 충족돼야 하고, 일반 주거지와 상당히 떨어져 있고, 소요부지 면적이 확보될 수 있는 환경면의 배려도 필요하다. 이러한 조건들을 갖춘 대규모의 공업단지를 조성하여 각종 공장을 유기적으로 한군데 모아 건설 운영하는 편이 여기저기 분산 입지시키는 것보다 훨씬 능률적이고 경제적이다.”

 

당시 군사혁명으로 대통령에 오른 박정희는 대단히 영민한 사람이었다. 그는 이병철의 주장을 듣고 옳다고 판단했고, 군인만의 독특한 추진력으로 일을 강하게 밀어붙였다.

 

본래 울산공업단지 외 2곳이 더 후보로 올랐다. 하지만 대규모 항만시설을 만들기에 울산이 다른 어떤 곳보다 적합하다고 당시 한국 정부는 판단했다. 이병철은 현지 답사를 통해 이 같은 의견을 박정희에게 전한다. 이병철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박정희 역시 이병철의 이 같은 식견을 믿었다.

울산 답사 당시 이병철의 기록이다.

 

“1961년 섣달 그믐날 우리 네 사람은 서울을 떠나 경주에서 1박을 하고 다음날인 원단 아침 울산에 도착했다. 마침 날이 맑고 온화해 바다와 구름이 온통 붉게 타오르는 울산만의 일출 광경은 우리나라의 밝은 앞날을 약속하는 서광을 보여주듯 장관이었다.”

 

이병철의 답사결과는 바로 박정희에 의해 채택됐다. 1962년 2월 3일 울산 현장에서 성대한 기공식이 거행됐다.

 

기공식에서는 훗날 한국 중고등학교 학생 교과서에도 잠시 등장했던 유명한 박정희의 연설이 진행된다. “4000년 빈곤의 역사를 씻고 민족 숙원의 번영을 마련하기 위해, 우리는 이곳 울산을 찾아, 여기에 신생공업단지를 건설하기로 하였습니다.”이 연설에 이병철 스스로도 감격해 했다고 고백한다. 이병철은 이 울산공업단지 건설에서 숙원이었던 비료공장 건설도 가능하리라 기대했었다.

 

실제 이병철은 울산비료공장 투자체를 구성하고 유럽과 일본으로 차관을 구하기 위해 다시 뛰었다. 공장 건설을 위해 각국 유명 공장 제조사들에게 견적서를 받았고, 가계약을 맺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계획도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이병철은 그 아쉬움을 이렇게 적고 있다.

 

“외자 5500만 달러와 내자 50억 환을 투자해 연산 30만톤의 대규모 최신 공장을 건설한다는 나의 계획은 우리나라의 연간 수출이 1억 달러 미만이었던 당시로서는 시기상조밖에 보이지 않았는지 모른다.”

 

그렇다. 당시 한국의 상황은 정말 열악했다. 천연자원도 인적 자원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 사람들 스스로 “우리는 아직 아니다”라는 자신감 부재상태에 빠져 있었다. 아니 자신감 부재 상태 정도가 아니라, “이제 이 정도면 됐다.”는 황당한 생각도 싹트고 있었다. 박정희가 언급했듯 4000년간의 가난이 사람들을 그리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병철, 아니 삼성 일가는 너무 특이한 사람들이었다. 이병철에게는 이제 사람들의 질시가 새로운 역경의 씨앗이 된다.

 

4.19 혁명과 5.16 군사정변으로 이병철의 숙원 사업인 아시아 최대 비료 공장이 좌절되는 듯 했다. 하지만 이병철은 경제계를 대표하여 정부를 설득했고, 군사정변으로 대통령에 오른 박정희는 강한 추진력으로 일을 진행했다. 1962년 2월 3일, 이병철의 오랜 꿈이던 비료공장이 현실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아직 한국은 가난하고 자신감이 없는 나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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