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12월 20일은 포루투칼의 식민지였던 마카오가 중국에 반환된지 21년이 되는 날이다. 이날 오전 마카오특별행정구의 진리엔화 광장 ( 金莲花广场)에서는 반환기념식이 거행됐다. 지난해 12월 20일에는 시진핑 주석내외가 참석한 가운데, 반환 20주년 기념식을 성대하게 진행해, 홍콩에 보란듯이, 마카오의 1국 2체제의 안정과 발전을 과시하기도 했다. 마카오는 2000년 밀레니엄 열흘전인 1999년 12월 20일 , 홍콩 ( 1997년 7월 1일 반환)보다 약 2년 늦게 중국에 정식으로 반환됐다. 현재 상주인구는 약 70만명으로 추산되고, 면적인 서울 강남구보다 조금 작은 32만 평방킬로미터이다. 홍콩의 식민역사를 1892년 아편전쟁이후로 본다면, 마카오의 식민역사는 훨씬 오래돼 1500년대 중반(1542년 경)부터 중국내륙 무역을 위한 상인집단과 상단보호를 명분으로 한 약간의 군대가 거주를 시작했다. 식민지의 형태도 홍콩과 많이 달라, 당시 명나라 시절 광동성 주둔 명군은 포루투칼 군의 조총과 화포만 없었을 뿐 전력이 월등했기에, 당시 포루투칼측에서는 명나라 조정에 세금을 내면서 임대형식으로 땅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아편전쟁 난징조약으로 홍
오늘 12월 13일은, 1937년 중국 난징대학살이 일어난 지 83주년이 되는 날이다. 1931년에 만주전쟁을 일으키고 만주국을 세워 동북3성을 실효지배하고 있었던 일본은,, 중국대륙에서 국민당군과 공산당군의 내전의 혼란을 틈타, 1937년 7월 7일 베이징 인근에서 루거우치아오사건으로 트집을 잡아, 베이징을 점령하고 남침하면서 전면적인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이후 넉달 만인 11월 초에 국민당 수도였던 쟝쑤성 난징시까지 진격해, 난징시민들을 무차별 살륙하는 난징 대학살사건을 일으키며 12월 13일 국민당의 심장을 점령한다. 중국자료에 의하면, 일본군은 이 약 40여일 동안 난징에서 약 30만명의 주민들을 학살했다고 기록돼 있다. 이후 77년만인 2014년 2월 27일, 중국 전국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제 7차 회의는 매년 12월 13일을, 난징대학살희생자를 위한 국가 추모일 ( 南京大屠杀死难者国家公祭日) 로 공식 선포한다. 그리고 10달 뒤, 국가 추모일로 지정된 첫 해인 2014년 12월 13일엔, 시진핑국가주석이 직접 참석해, 과거 역사의 치욕을 잊지 않고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의 길을 개척할 것이라는 비장한 연설을 했고, 이 광경은 약 2시간동안 14억 인
인민일보는 최근, 중국의 중의약(中医药 )이 중국의 코로나19창궐때 어떤 약으로 환자들의 생명을 구했는지에 대한 흥미있는 영상 인터뷰를 내보냈다. 즉 베이징의 저명한 중의약 전문의 중의와의 인터뷰를 갖고, 중의약이 어떻게 코로나19를 지료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영상을 내보낸 것이다. 중국은 지난 1월 초 우한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시작되자마자, 인민해방군을 동원해 1,000개 병상의 훠선샨 특별의원을 10일만에 새로 건설해 중중의 위급환자들을 다 입원시키고 철저히 격리시켰다. 이곳에서는 이후 양의학 치료를 집중했다. 그리고 중중 초기환자와 경증환자들을 우한시의 대형전시관과 체육관에 임시병원인 방창의원(方舱医院)을 건설해, 역시 일반인들로부터 격리시켰다. 이 곳에서는 이후 중의학 지료를 집중했다. 중국당국은 이 중증과 경증환자를 격리한 방창의원에, 텐진 중의약대학의 총장으로 하여금 대규모 중의약(中医药药)전문의 중의(中医) 치료단을 조직하게 해 우한으로 급파시켰다. 약 500여명의 중의학의료진을 인솔하고 우한 방창의원의 경증환자들의 치료를 전담했던 장뽀리 (张伯礼) 텐진중의약대학 총장팀은, 즉시 서양의약처방에 중의약처방을 혼용해 투약시켰고
위 사진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국의 남침으로 시작된 한국전쟁에 미국등 유엔군이 참전한 이후 북한지역으로의 반격이 시작돼 북한 전역의 함락이 예상되자, 북한이 중국에 구원을 요청했고, 이에 중국이 인민해방군을 북한에 파견하는 장면을 담은 것이다. 중국은 1950년 10월 19일부터 인민해방군중에서 먼저 지원군을 받아, 38, 39, 40, 42 연대를 조직해 당시 안동( 安东) 시로 불렸던 지금의 단동시의 압록강철교를 걸어서 북한에서 벌어진 미군과의 전장으로 투입했다. 위 사진은 1950 년 8월 27일 연합군의 일원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의 공군기가 중국의 참전 이전에도 중국의 동북지방의 중국영공을 침입해 무단폭격을 했다고 중국 청년보가 게재한 사진가운데 하나이다. 중미양국이 양국간 국가이익을 놓고 한 치의 양보없는 신경전을 펼치고 있는 가운데, 지난 1950년 한국전쟁에서 북한을 도와 참전한 중국이 2020년 항미원조전쟁 공식 기념일인 10월 25일, 북중 국경도시 단동시에서 새로운 항미원조전쟁의 기념관의 준공식이 대대적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현지소식통의 전언이 있다. 새 기념관의 건립현장 주변에는 특히 외국언론의 접근이 막혀있고, 중국 국내언론도
작금의 홍콩의 사태는 2010년대부터 홍콩의 반중세력들이 홍콩행정장관 직선제를 내세우면서 시작된 혼란의 산물이라는 논의가 있다. 중국과 홍콩은, 1997년 영국이 150여년을 식민지배했던 홍콩을 돌려주고, 중국은 150여년을 빼앗겼던 홍콩을 되돌려 받는 그런 관계였다. 두 나라는 향후 홍콩의 과도기간을 50년으로 정하고 홍콩기본법에 합의했다. 양국이 합의한 홍콩기본법에 따르면, 홍콩행정장관은 800명의 선거인단의 투표로 간접선거하기로 돼있다. 그 임기는 5년이고 한 번 더 연임할 수 있게 돼있다. 그렇게 합의된 규정에 의해 1997년부터 홍콩내 명망있는 인사들이 홍콩행정장관을 역임하고, 2020년 현재 홍콩행정장관인 캐리 람은 제 5대 장관으로서 2017년에 임명돼 2022년까지 1차 임기를 수행하는 중이다. 그런데 지난 2014년 홍콩의 반중세력은 홍콩행정장관의 직선제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고, 그 때부터 홍콩의 정정이 내내 불안해져 오다가, 미국 트럼프정부의 등장이후 직간접적인 홍콩간섭이 본격화되었고, 코로나 사태로 트럼프의 재선이 불확실해지면서 중미 무역분쟁속에서 홍콩이 핫 플레이스가 되버린 양상이다. 1984년 9월 26일 중국과 영국이 베이징에서 사
그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홍콩보안법에 대한 관심이 요즘은, 오는 9월 6일에 치뤄질 홍콩 입법회의원 선거뉴스로 옮겨진 것같다. 대체라기보다는 2020년 홍콩의 봄과 중미관계를 뜨겁게 달궜던 홍콩보안법의 제정과 시행의 연장선상에서 주목을 받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은, 9월의 입법회 선거에서 반중파가 다수를 점해, 홍콩보안법을 백지화시키기고 반중에 앞장서서 홍콩독립하라며, 격려하고 부추기고 보도자료를 내며 세계의 반중분위기를 고양시키는 형국이다. 영국등 서방이 홍콩을 격려하고 부추긴 것은 20여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먼저 궁금하다. 영국은 홍콩을 식민지로 지배했던 동안에, 홍콩인의 대표들로 입법회를 구성해서, 홍콩인의 의사를 존중하면서 식민지홍콩을 지배했을까 ? 아니다. 그렇다면 영국이 지금 지지한다는, 홍콩인들의 자치기구인 입법회의가 언제부터 생긴 기구인지 궁금해진다. 1995년이다. 1995년이면 홍콩반환 1997년의 2년 전의 일이다. 토탈 157년이나 홍콩을 식민지배한 영국은, 식민지배 155년 째되던 해에, 즉 중국에 돌려주기 2년전에야 홍콩에 입법회의를 구성하라고 허용했다. 2년 있으면 원주인인 중국에게 돌려줘야 하는데, 그럴려면 70년대나 8
코로나19로 예년에 비해 두 달이나 늦게 열리고 기간을 단축해 폐회한 2020년 양회에서, 중국인민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정치협상회의의 위원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은 주쩡푸 (朱征夫) , 올해 57세인 그는 광동성 광저우시의 대형로펌 인 동방쿤룬법률사무소의 주주이며, 전중국변호사협회 부회장이다. 그는 지난달 정협회의에서, “국가가 모든 인민에게 전염병을 극복한 노고를 치하하고, 어려워진 생활을 보조해 코로나19로 인한 경제난국도 탈피하는 방안으로, 14억 인구 모두에게 1인당 2,000 위안씩의 재난 보조금을 지급하자"는 안건을 상정했다고 한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중국인민들이 이를 반겼고, 인터넷에서 일거에 젊은이들의 환호를 받았다. 중국 돈 2,000 위안은 환율로 계산하면 우리 한화로 약 35만원 내외가 되지만, 중국물가가 한국에 비해 약 1/3 정도인 것을 감안하면 1백 만원 가량으로, 인민 1인 당 보조금으로서는 매우 많고 후한 금액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의 인구가 14억명이 넘는 관계로 이 보조금 총액은 무려 2조 8천억위안, 한화로 환산하면 약 450조원이란 어마어마한 재원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오자, 정협내에서도 논란이 적
홍콩의 반중시위로 인한 홍콩탈출러시가 전해지는 가운데, 일부언론들이 홍콩의 대체지로 중국이 하이난 섬을 개발하려 한다는 논조를 보이고 있다. 사실이기도 하고 사실이 아니기도 한 그런 논조이다. 하이난 섬이 중국의 새로운 자유무역항으로 개발되는 건 사실이지만, 홍콩의 대체지로 부각된다는 논조는 그 상관관계가 다소 왜곡됐다는 느낌이다. 현재의 하이난 섬 ( 하이난성)은 , 일찍이 1988년 4월, 개혁개방의 설계사 덩샤오핑이 하이남 섬을, 당시의 광동성 하이난 행정구를 하이난 성으로 승격시키면서, 하이난 경제특구로 지정했던 역사적 사실이 있다. 그리고 2018년 4월에는 시진핑주석이 하이난성을, 중국의 제 2의 개혁개방의 상징으로서, 세계적인 자유무역항과 자유무역지대로 개발하겠다는 계획을 직접 발표한 바가 있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홍콩의 범죄인 송환법의 문제는, 중국대륙에서도 크게 두드러지지도 않았고, 심지어 홍콩에서 여친을 살해한 파렴치한 살인범의 처벌문제였을 뿐, 반중국시위의 프레임과 전혀 상관없는인도적인 법개정의 사건이었다. 홍콩내부에서 홍콩의 범죄인 송환법개정의 필요성이 처음 거론 된 것은 2018년 3월이다. 그 당시는, 자기 여친과 함께 대만으로…
중국국가는 짧다. 딱 46초다. 우리처럼 1,2,3,4절도 없다. 아래 가사가 전부다. 내용도 명료하다. 起来! 不愿做奴隶的人们! 把我们的血肉,筑成我们新的长城! 中华民族到了最危险的时候, 每个人被迫着发出最后的吼声。 起来! 起来! 起来! 我们万众一心,冒着敌人的炮火前进! 冒着敌人的炮火前进! 前进! 前进! 前进!进! 일어나라 ! (깨어나라!) 노예가 되고 싶지 않은 이들이여 ! 우리의 피와 살로, 우리의 새로운 장성을 만들자 ! 중화민족이 큰 위험에 빠졌으니, 일제이, 마지막 울부짖음을 내 뱉을 때가 되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 일어나라! 모두 한 마음으로, 적진 포화에 맞서 전진하자! 적진 포화에 맞서 전진하자! 전진 ! 전진 ! 전진 ! 나가자 ! 중국국가의 별칭은 의용군행진곡 <义勇军进行曲> 이다. 이 노래는 상하이에서 1935년에 제작된 '풍운남녀' 《风云儿女》라는 영화에 삽입된 제 1주제곡, 즉 ost 인 셈이다. 가사는 한 눈에 봐도 전투적이고 비장하다. 들어보면 힘차고 울림이 장엄하다. 이런 내용과 느낌의 주제곡이 삽입된 영화라면, 영화스토리도 감이 잡힌다. 거기다 이 영화가 개봉됐던 1935년 당시의, 상하이와 중국상황을 보면 영화의 배경
홍콩의 식민지 시대의 이름은 British Hong Kong 이었고, 식민지 홍콩을 상징하는 깃발도 있었다. 지금은 중국의 오성홍기와 홍콩특별행정구의 구기( 区旗:Regional Flag of the Hong Kong Special Administrative Region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가 걸려있다. 반중시위대는 이 깃발들을 거부한다. 그들은 무슨 깃발을 걸고 싶은 것일까? 현재 약 750만명이라는 홍콩의 인구가운데, 식민지시절의 홍콩을 상징하는 깃발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궁굼하다. 그 깃발에는 홍콩의 수치스런 식민지 역사가 고스란이 담겨져 있는데 말이다. 여기서 1997년 7월 1일 0시 이전에 식민지 홍콩은 어떤 깃발을 내걸고 있었는지 최신 것부터 역순으로 알아보도록 한다. 위 깃발은 1959년부터 약 40년동안, 식민지 홍콩이 중국으로 회귀할 때인 1997년 6월 30일 자정까지 내걸렸던 식민지홍콩의 깃발이다. 원래 영국국기가 왼쪽 상단에 위치하고, 전체 바탕이 아무 것도 없는 푸른색인 깃발은, 과거 영국의 해군기였다고 한다. 이 과거 영국의 해군깃발에다 오른 쪽 푸른색 바탕에 웬 문장
1839년: 중영 무역마찰로, 영국해군 중국남부 광동성 광저우침략, 제 1차 아편전쟁 (第一次鸦片战争) 시작. 1841년: 중국 패배. 홍콩섬 할양약속. ( 츄안비초약, 穿鼻草约 , Convention of Chuanbi) 청왕조 불승인 1942년: 청왕조 홍콩섬 할양초약 불승인이후, 영국해군 북상 . 샤먼 닝포 상하이점령후, 영국해군함대 창지앙( 长江, 양쯔지앙 扬子江)북상해 난징항구 점령 섬멸 위협, 1842년 8월: 청왕조 굴복, 홍콩섬 할양을 약속한 츄안비초약을 추인하는 난징조약 《南京条约》 체결. 1860년: 홍콩섬 북쪽 건너편 지우롱(九龙)반도남쪽 항구지대 추가 할양. ( 영국.프랑스 연합군 제 2차 아편전쟁야기, 텐진점령 베이징공격, 원명원 (圆明园,Old Summer Palace)약탈방화, 베이징 조약《 北京条约 》 체결로 홍콩 할양지역 확대. ) 1898년: 청왕조 말기 홍콩경계 확장조약《展拓香港界址专条》으로, 영국에게 지우롱반도 북쪽 선쩐허 남쪽( 九龙半岛以北、深圳河以南)의 땅과 주변의 약 200개의 섬까지 99년동안 할양 확정. 위에서 살펴본대로, 그동안 영국의 식민지라 불려온 홍콩은, 총 3차에 걸쳐 영국에게 할양, 조차되었다. 그에 따
지난 달 26일, 중국의 유일한 도박장인 '마카오의 도박왕' 이라 불리던 허홍션(何鸿燊)이 약 15조원의 유산을 남기고 사망했다. 향년 98세 무척 장수한 것같지만 2009년 87세때 노환으로 쓰러진뒤 강심제등 약으로 연명하다 사망했다 허홍션은 포루투칼의 식민지였던 마카오의 도박왕으로 영어명 '스탠리 호' 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불렸다. 이제 중국의, 아니 홍콩의 호사가들은, 허홍션의 부인이 4명에다, 자식이 17명, 거기에 누나형제 그리고 조카들까지 수십 수백명에 이르는 친인척들간에 벌어질 유산배분의 진풍경을 흥미진진해하는 분위기다. 왜냐하면, 도박왕 스탠리 호가 누린 부의 모든 것이, 홍콩과 마카오의 식민지초기 유럽에서 건너온 영국국적의 증조할아버지와 할아버지때부터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이다. 스탠리 호의 죽음은 말하자면 홍콩인과 중국인들에게, 비운의 과거 식민지역사가 청산되는 상징적인 사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후 간략하게 기술하겠지만, 먼저 독자들의 사전 이해를 돕기위해, 한국의 식민지역사에다 기간을 늘이고 여러 가정을 섞어, 스탠리 호같은 '제주도의 도박왕' 얘기를 비유해 쉽게 풀어보자는 것이다. 즉 일찌감치 서양대포를 들여와 무력을 키운 일본이…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만난 목사의 도움아래, 어느덧 영어에 자신을 가지게 된 1881년, 만 20세가 된 쑹자슈는 미 남부의 가장 유명한 대학에 입학을 한다. 듀크대학이다. 노력한 덕에 장학금도 받는다. 당사 쑹자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사상이 바로 링컨의 삼민주의였다고 한다. 듀크 대학에서 쑹자수는 미국에서 막 탄생한 민주주의에 훈도된다. 하지만 이때 쑹자수 가난하고 약해 서구의 식민지로 전락한 청나라의 사람으로서, 민족의식을 새롭게 인식한다. 바로 이때 미국에서도 중국 화교들이 인종 탄압을 강하게 받기 시작하던 때다. 중국인 거리에서 중국인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테러가 백주에도 자행됐고, 심지어 공장에서 일하던 중국인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살해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쑹자수는 분노했다. 하지만 약소국 국민의 설움은 분노한다고 풀어지는 게 아니었다. “조국이 더 강해져야 한다. 그래야 해외에서 이런 설움을 받지 않는다.” 청년 쑹자수의 가슴에 핀 생각이었다. 쑹자수는 1882년 소망했던 신학대에 입학해 1885년 학위를 마친다. 학위를 마친 쑹자수가 중국에 돌아온 것은 1886년 1월의 일이었다. 돌아온 쑹자수는 당당한 미국 신학대를 졸업한 목사의 신분이었다.…
쑹자수가 보스턴을 떠나 노스캐롤라이나에 도착해 도움을 받은 이는 목사였다. 쑹자수는 외로움을 덜기 위해 교회를 찾았고, 그 교회 목사의 눈에는 어린 나이에 꿈을 키우며 열심히 일하는 쑹자수가 쏙 들어왔다. 쑹자수는 여기서 1880년 11월 7일 세례를 받고 정식으로 서구식 이름도 얻는다. 查理·琼斯·宋(Charles Jones Soong)훗날 중국에서 가장 유명해진 이름이다. 쑹찰리였다. 그동안 쑹자수가 어렸을 때 입양을 갔던 의부 (수양아버지)로 부터 학대를 받았기에 미국행을 택했다고 쓴 글이 적지 않은데, 그건 오해가 있는 듯하다. 원래이름이 한자오준(韩教凖)으로 한씨 성을 가지고 있었던 쑹자수는 1875년 그가 12살 때, 자녀가 없었던 외숙부(外叔父)의 집안으로 입양되어 "쑹(宋)"씨성을 가지게 되었다고 전해진다. 만약 학대를 피해 도망을 갔다면-- 사실 여기에도 중국 연구가들 사이에 이견이 있지만-- 미국에서 쑹자수가 의부모에게 편지를 썼다는 기록이 많은데 거짓이었을 것이고, 미국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도 쑹씨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쨋든 그 미국 목사는, 쑹씨 찰리쑹이라는 이름을 새로 가지게 된 중국 청년의 영어 실력을 키워주기위해, 미국인
‘쑹아이링’(宋藹齡), ‘쑹칭링’(宋慶齡), ‘쑹메이링’(宋美齡) 중국 근대사에 모를 수 없는 세 자매다. 쑹아이링이 첫째, 쑹칭링이 둘째, 쑹메이링이 셋째다. 모두 당대 최고의 남편을 맞았다. 쑹아이링은 당대 중국의 최고 은행가였던 쿵샹시가 남편이었다. 그래서 세칭 ‘돈을 사랑한 여인’이라 불린다. 쑹칭링은 지금도 존경을 받는 여성이다. 중국 근대혁명의 아버지 쑨원이 남편이다. 결혼시 쑨원은 50, 쑹칭링은 22살이었다. 쑨원의 혁명을 도왔고, 뒤에 국민당의 부패를 비판했다. 중국 공산화 이후에도 대륙에 남아 최초의 여성 국가 주석이 됐다. 그래서 얻은 별명이 ‘나라를 사랑한 여인’이다. ‘중국의 잔다르크’, ‘인민을 사랑한 여인’이라 불리기도 한다. 쑹메이링의 남편도 그 못지않게 유명한 인물이다. 바로 장제스다. 중국 쑨원의 후계자로 국민당을 물려받아 총통이 된다. 하지만 결국 국공내전에서 패해 대륙을 떠나 타이완에 주둔하게 된다. 현재의 타이완 정부는 바로 국민당이 세운 정부다. 현대 중국의 혁명에서 공산 중국과 타이완 정부의 건국까지 모두 쑹씨 집안의 자매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쑹씨 집안을 중국의 마지막 황조였다고까지 말한다.…
인생이란 대학에 다녀. 배움이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많은 지식을 얻는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정말 그럴까? 사실 인생에서 실제 많은 지혜는 필요치 않다. 오히려 많은 지혜는 필요한 결정을 한때 방해가 될 때가 많다. 많이 아는 것보다 정말 필요한 것을 아는 게 중요하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는 책의 삶을 살기 위해 지혜를 배우는 게 아니라, 인생을 잘 살기 위해 책 속의 지혜를 담아 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때론 책 속의 지혜보다 인생의, 삶 속의 지혜가 더 가치로울 때가 많다. 인생 3재(才)란 말이 있다. 인생을 사는데 딱 세 가지 재주만 있으면 된다는 것이다. 무엇이든 남보다 잘하는 게 3가지 있으면 성공한다는 의미다. 중국 근대 지도자 가운데 덩샤오핑은 이런 배움의 의미를 정말 잘 알았다 싶다. 처음 소개한 말은 덩샤오핑邓小平이 1974년 중국을 방문한 미국 대학 방문단을 접견하면서 한 말이라고 한다. 중국 런민르바오가 관련 사실을 전한다. 덩샤오핑은 당시 이렇게 말했다. 난 대학이란 곳을 다녀본 적이 없소. 그러나 항상 내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인생'이란 대학을 다녔다고 생각해왔소. 인생이란 대학은 내가 죽는 순간이 바
중국 손자이래 최고의 병법가로 마오쩌둥을 꼽는다. 그런데 정작 마오쩌둥의 전술이 한국에 알려진 것은 별로 없다. 도대체 마오쩌둥은 어떻게 전쟁을 치렀을까? 1947년 마오쩌둥이 서북야전군을 위해 식량을 조달했던 일화가 전해진다. “모든 것을 다 걸고, 반드시 이긴다” 마오쩌둥의 패도(覇道)적 기질이 잘 나타난다. 마오쩌둥이 허난성의 자(자)현을 해방시킬 때 일이다. 마오쩌둥이 말했다. “자현을 반드시 해방시키겠오. 단 3일이면 됩니다. 그러니 3일동안 우리 군이 먹을 수 있게 마을의 모든 것을 내주시오.” 마을 현장이 알았다고 답을 했고, 전쟁은 시작됐다. 마오쩌둥은 치열하게 공격을 했고, 마을 주민들도 약속한 식량을 내놓았다. 첫날 마오쩌둥 군은 마을에 있던 곡식을 다 먹었다. 이틀째 마을 주변의 모든 곡물을 수확해 그 것도 다 먹었다. 세쨋날 마을의 모든 가축이란 가축은 다 죽여 그 고기를 먹었다. 그렇게 마지막 날 전투가 치열하게 전개됐고 자현은 공산화됐다. 하지만 그 자현은 가축이 씨가 말라 그 3년간 가축을 찾아 볼 수가 없었다고 한다. “沉舟破釜”chén zhōu pò fǔ “돌아갈 배를 침몰시키고, 밥을 지을 솥을 부순다” 배수진을 친다
우리에게 해서파관의 저자로 유명한 우한(吳晗;1909~1969)을 비꼬는 일화 하나 있다. 우한이 얼마나 겁이 많은 지 보여주는 일화다. 항일전쟁 당시 우한은 쿤밍에서 교사를 했다. 중국 당시 쿤밍은 일본 폭격기의 시도 때도 없는 폭격을 받았다. 그 때마다 교사들은 학생들과 함께 긴급피난을 해야 했다. 젊은 학생들이야 순식간에 수십 미터를 달려 숨을 곳을 찾았지만, 교사들은 체력이 달랐다. 무엇보다 당시 교사들은 가부좌를 틀과 정좌를 한 채 책을 읽는 게 일반적이었다. 즉 평소 걸음걸이가 자연스럽게 팔자걸음이 된다. 더욱이 점잖은 체면에 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곁에서 폭탄이 터지고 사람이 죽는데? 체면을 챙길까? 실제 학생들 입장에서는 그 순간 어떤 면모를 보여주느냐가 진정한 수양의 수준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쿤밍의 학교 교장의 경우 폭격을 앞두고 지팡이처럼 쓰는 긴 우산을 들고, 조금도 흔들림 없이 천천히 ‘긴급(?)대피’를 했다. 하지만 우한은 아예 체면을 챙기지 않았다. 기고, 달리고, 또 기고 달리고 그렇게 숨을 곳을 찾았다고 한다. 학생들은 “어디 선생의 풍모가 저렇더냐”고 놀렸다고 한다. 이 우화를 읽고 아마도 사실이
서가를 보면 그 주인을 안다. 인터넷 시대 이제 구문이 됐지만, 말의 진체(眞諦)는 변함이 없다. 책 한 권은 그 사람을 대변하지 않지만, 그 사람이 읽은 책 전부는 그 사람을 대변하고도 남는다. 대대로 책을 사랑하는 것은 동양의 미덕이다. 중국은 물론 우리 한국에서도 어느 정도 집안이 되면 집에 서가를 갖추고, 책을 읽었다. 부친 세대가 읽은 책을 아들 세대가 읽었다. 마오쩌둥이나 덩샤오핑 등 중국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책 읽기를 좋아했다. 틈이 나면 책을 놓치 않았다. 베이징대학 도서관 사서 경험까지 했던 이가 마오쩌둥이다. 마오쩌둥이 꼽은 자신을 인생을 바꾼 3가지 책이 있다. 그는 1936년 미국 기자 에드거 스노우와 인터뷰에서 3권의 책을 꼽았다. 하나는 막스와 엥겔스가 쓴 <공산당선언>, 두 번째는 독일 사회학자 카를 카우츠키의 <계급투쟁>이었다. 마지막이 영국 사회학자 토마스 커컵의 <사회주의사>다. 모두 사회주의 관련 서적이다. 말년의 마오쩌둥은 유머집을 읽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특히 공처가 이야기를 좋아했다고 한다. 말년 마오쩌둥은 권력욕에 휩싸인 장칭을 어쩌질 못하고 살았다.어쩌면 마오쩌둥
중국 난징대학살 81주년인 13일 중국 전역에서 추모행사가 이어졌다. 난징대학살은 1937년 12월13일부터 이듬해 1월까지 국민당 정부 수도였던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이 저지른 대규모 중국인 학살사건이다. 중국 정부 당국과 학계는 일본군이 30만명 이상을 살해한 것으로 보는 반면 일본 학계는 대체로 피해자 규모를 2만∼20만 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중국은 지난 2014년부터 12월 13일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해 희생자를 애도해 왔다. 2015년 10월에는 중국이 신청한 난징대학살 관련 자료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기도 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난징에 관한 나의 마지막 기억은 죽어간 중국인, 죽어간 중국인, 오직 죽어간 중국인이었다.”(AP통신 기자 예이츠 맥대니얼의 증언)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한다"(난징대학살을 고발하는 책자 「난징의 강간」에 적힌 글귀) 홀로코스트에 필적하는, 어쩌면 그를 능가할 야만스런 대학살 1937년, 중일전쟁 시기 일본군이 난징점령 입성을 다룬 일본 아사히 신문 뉴스. 대부분의 전시 선전영화는 부대의 위민활동이나 대민지원 장면을 삽입해서 해당 지역을 해방시킨 해방군으로 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