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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의 시작 - 호암 이병철(32)

한국비료와 이병철의 10년의 고난.-5

 

한국경제인협회의 탄생

 

 

5.16 군사 정권의 국정 운영의 핵심은 하나도 경제 건설, 둘도 경제건설이었다. 그 뒤가 바로 안보였다.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사정권세력은 ‘과감’이라는 군사정권을 특징을 그대로 살렸다. 각종 경제 건설 계획을 수립하고 과감하게 실천했다.

사실 어떤 계획도 실천보다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훌륭한 계획이라도 실천되지 않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물론 좋은 결과를 위해 좋은 계획 필요하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고려 없이 각종 이상만을 담은 실천할 수 없는 계획은 이미 좋고 나쁨의 평가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너무 많은 선과 색을 넣으면 그림은 지저분할 수밖에 없고, 완성될 수 없는 이치다.

 

 

바로 4.19 혁명 정권의 한계였다. 이승만 독재를 무너뜨린 것은 다른 게 아니었다. 순수한 국민의 힘이었다. 탱크와 총에 몸으로 맞섰던 일반 학생 국민들의 용기였다.

그러나 그 혁명으로 정권을 얻은 시민 정부는 너무나 무력했다. 수많은 주장들이 서로 맞섰고, 양보하지 않았다. 걸핏하면 거리로 나서 시위를 했다.

 

 

학생들은 학생대로, 공장의 공원들은 공원대로, 심지어 경찰도 경찰대로 시위를 했다.

어느 한 곳 옳지 않은 주장이 없었고, 그래서 어느 하루 혼란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매일 서로가 더 옳다고 주장을 했다.

 

 

5.16 군사 정권은 이런 혼란 속에 탄생했다. 혼란 속에 모두가 차라리 이전 이승만 독재가 더 나았다는 한탄이 나올 때 등장을 했다. 총과 칼로 혼란을 정리했다. 민주의 입장에서 논란의 소지가 있지만, 혼란은 그 어떤 수단보다 빠르게 정리됐다.

 

 

이병철은 당시를 이렇게 정리했다. “4.19 이후 계속된 혼란으로 경제활동은 위축되고, 물가고와 실업문제가 심각하였다. 그 위에 농산물의 흉작까지 겹쳐 쌀 파동마저 일어났다. 이렇게 중첩된 경제 문제의 타개를 위해서 정부와 경제계의 협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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