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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그룹의 시작 - 호암 이병철(31)

한국비료와 이병철의 10년의 고난.-4

5.16군사혁명 발발

 

 

이병철이 김포 공항에서 청년의 손에 이끌려 도착한 곳은 엉뚱하게도 명동의 메트로 호텔이었다. 그곳에서 이병철은 가족과 통화를 한다. 가족에게 우선 자신이 무사하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리고 그 곳에서 박정희 혁명정부 최고회의 부의장을 만나 담판을 한다.

 

 

당시 상황은 이렇다. 이병철이 4.19 혁명정부의 전횡에 낙담해 일본에서 유유자적을 하고 있을 때 4.19혁명이후 혼란한 사회를 안정시키겠다며 1961년 5월 16일 군사 혁명이 일어난다. 혹자는 정변이라고도 한다. 4.19 혁명이 일어난지 불과 1년만의 일이다.

사실 이병철의 자서전에도 고백하고 있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의 갑작스런 붕괴이후 한국은 국정 운영의 주체가 없었다. 도심에서는 경찰과 학생, 노동자들이 각자 자신들의 주장을 하며 시위를 벌였다. 나라가 온통 주장뿐 이었다.

 

 

군사 혁명 정부는 빠르게 나라를 안정시켰다. 국민들의 불만도 빠르게 잠재웠다. 그 중 하나가 부정축재자들에 대한 처벌이었다. 4.19 혁명 정부 역시 국민들의 욕구불만을 덜어주기 위해 이병철을 부정축재자로 몰았다. 이병철은 당당히 “말도 안되는 세금을 부과하고 그 것을 내지 못했다고 부정축재자로 모는 게 문제”라고 맞섰다. 그리고 한국을 떠났다.

 

 

4.19 혁명정부나 5.16 군사 혁명정부나 같은 문제를 들고 나와 국민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했다. 5.16 혁명정부는 군의 힘을 바탕으로 해 더 강한 집행력을 보였다. 부정축재자 10명을 감금하고 일본에 있던 이병철을 갖은 수단으로 압박해 귀국하도록 종용했다. 이병철을 그렇게 귀국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병철을 기다리고 있던 상황은 일본에서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여기에 바로 박정희 군사 정권의 뛰어남이 숨어있다. 4.19 혁명정부와 비교해 박정희는 보다 현실을 알고 있었다. 이병철은 이 박정희를 1961년 6월 27일 처음 만난다. 26일 귀국 한 뒤 바로 그 다음날 이었다.

 

 

이병철의 기록에 따르면 이 장면은 한국 경제의 축을 바꾸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27일 오전 박정희 부의장과 면담이 잡혔다는 통보를 이병철은 받는다. 이병철의 기록이다.

 

 

“지프를 타고 간 곳은 후에 원호처 청사가 된 참의원 자리였다. 비서실을 거쳐 안내된 100여 평이 돼 보이는 넓은 방에 들어서자, 군인 몇 사람과 함께 강직한 인상의 검은 안경을 쓴 사람이 저쪽에서 걸어왔다. 검은 안경의 박정희 부의장을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방안은 자뭇 삼엄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박정희 최고회의 부의장의 첫인상은 아주 강직해 보였다. 지도자로서 덕망은 어떨까 하고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데, 검은 안경의 박 부의장은 “언제 돌아오셨습니까. 고생은 되지 않았습니까?”라고 안부 인사부터 하는 것이었다.

의외로 너무나 부드러운 음성에 안도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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