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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과 느닷없이 찾아든 전기…사업의 뜻을 세우다

졸업장 하나 없다

“졸업장 하나 없다.” 이병철이 스스로 자서전에서 고백한 내용이다. 일본 와세다 대학 유학을 포기하면서 이병철은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를 다니기만 했지 졸업하지 못해 졸업장 하나 없었다. 오랜 감기로 몸이 허약해졌다는 게 대학 중퇴의 이유였다. 그러나 앞서 살폈듯 정말 그냥 공부가 하기 싫었다고 하는 것 이상으로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 이유였다. 잠시 일본 곳곳을 유람하며 방황한다. 그러다 이병철은 돌연 무엇인가에 이끌리듯 가방을 싸들고 한국행 연락선에 몸을 싣는다.

 

 

“너도 생각이 있겠지. 요양이나 잘 해라.” 이병철의 부친은 그렇게 아들의 귀향을 반긴다. 혼날 줄 알았던 이병철에게는 뜻밖의 일이었다.

 

 

고향산천의 공기와 물은 역시 좋았다. 일본에서 그렇게 이병철을 괴롭히던 감기는 씻은 듯 사라졌다. 몸도 몸이지만, 마음이 편한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편안함 때문이었을까? 이병철의 뜻하지 않았던 방황이 시작된다.

 

 

일본 생활에서 돌아온 이병철은 물론 처음엔 다양한 시도를 해본다. 일본은 당시 아시아에서는 가장 발달한 나라였다. 산업화에 가장 성공했다. 산업 분야는 무엇이든 한국보다 수십년 앞선 상태였다. 철도나 기계분야는 말할 것도 없고 농업 분야도 마찬가지였다.

 

 

농업 생산효과 자체가 달랐다. 당시 한국이 전형적인 아시아 농촌 생산 방식이었다면 일본은 조금씩 산업화된 농업 구조를 갖춰가고 있었다.

 

 

 

 

 

돼지만해도 일본에서는 종자를 개량한 ‘개량돈’을 키우고 있었다. 이병철은 이런 개량돈을 들여와 키워도 보고, 보다 값비싼 야채 재배도 시도해본다. 하지만 모두 뚜렷한 성과 없이 끝나고 만다. 이병철은 자서전에서 “그냥 취미 수준의 일들이었다”고 밝힌다.

 

 

그렇다고 이병철이 집안 일에 나설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당시 집안 일은 이병철의 부친과 형이 나서 모든 것을 도맡아 처리하고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가부장제도가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집안 일은 가장과 장남이 알아서 하는 게 기본이었다.

 

 

결국 이병철은 도박에 손을 댄다. 할 일 없는 한량이 할 일은 도박과 계집질이다. 이병철도 어쩔 수 없는 당대 돈 많은 집의 배운 한량이었던 것이다. 이병철의 즐겼던 도박은 소위 골패라는 것이었다. 패를 돌려 숫자로 쌍을 이루는 게임이다. 이병철은 매일 무위도식하고 밤새 나가 도박을 했다.

 

 

“노름은 한밤중까지 계속돼 지칠대로 지쳐서 달그림자를 밟으며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되풀이되었다.” 이병철 자서전에서 나오는 구절이다.

 

 

 

 

 

그런 이병철을 깨운 것은 달빛에 비친 아이들의 얼굴이었다. 기억하는 독자들이 있겠지만, 이병철은 중학교 3학년이었던 1926년 결혼을 했다. 경북 달성군 사육신 박팽년의 후손인 순천 박씨 기동공의 4녀, 박두을이 그의 부인이었다. 세월은 흘러 일본 유학에서 귀국한 이병철의 나이도 어느 26세다. 둘 사이에는 세 아이가 있었다. 이병철은 당시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람은 일생을 통해 몇 번은 전기를 맞는다. 스스로 그것을 만드는 때도 있지만 느닷없이 찾아올 때도 있다. 그 느닷없이 찾아 전기를 어느날 맞게 되었다.”

 

 

그날도 골패 노름을 하다가 밤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밝은 달빛이 창너머로 방안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때 나이 26세. 이미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다. 달빛을 안고 평화롭게 잠든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문득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심정이 되었다.

 

 

“너무 허송세을 했다. 이제 뜻을 세워야 한다. 잠자리에 들기는 했으나 그날 밤은 한잠도 이룰 수 없었다.”

 

 

잠자리 든 이병철의 머리 속에는 온갖 잡념이 스쳐갔다. 무엇보다 가슴을 짓누른 것은 후회였다. 깊은 반성이었다. 그리고 이병철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들을 다시 고민했다. 돈 버는 일을 만드는 것, 사업이었다. “뜻을 굳힌 것이 사업이었다. 물론 구체적인 계획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이병철의 사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笔者 淸露 图片摘自 三星集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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