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컬럼] 중국의 여론정치 (끝) - 덩사샤오핑, 저우언라이 그리고 복권

2019.03.15 09:35:12

 덩샤오핑의 이 편지는 당장 마오쩌둥에게 전달되지는 못했다. 당시 덩샤오핑은 연금 상태였기 때문이다. 덩샤오핑의 편지는 각종 심의를 거쳐 1972년 8월 4일에야 비로소 마오쩌둥 손에 쥐어지게 된다. 편지를 읽은 마오쩌둥은 이렇게 입장을 밝혔다.

 

과거 소련에 의해 내가 숙청 위기에 처했을 때 덩샤오핑은 끝까지 내 편을 들어줬다. 그가 역사 문제가 있다고 볼 수 없다. 단 한 번도 적에게 투항한 적이 없다. 전공도 혁혁하다. 건국 이래 공도 있다. 이 이야기는 과거에도 많이 했지만, 내 다시 한번 언급한다.

 

 연금 상태의 덩샤오핑에게는 사실상 면제 부가 주어진 것이다. 옆에서 마오의 이 같은 언급을 들은 저우언라이周恩来는 바로 그 사실을 깨달었다. 사실 세상에 누가 있어 저우언라이보다 마오쩌둥의 한마디 한마디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까?

 

 

 저우언라이는 바로 사무국에 연락해 조치를 취한다.

당장 덩샤오핑의 편지와 마오 주석의 발언을 문서로 작성해 정치국 간부들에게 열람하도록 하라. 

그리고 그 자신도 8월 15일 정치국 회의 석상에서 다시 한번 덩샤오핑의 편지와 이에 대한 마오쩌둥의 평가를 언급한다. 조금씩 덩샤오핑의 복권을 공식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 1972년 1월 10일 천이陈毅의 추도식에서 마오쩌둥의 덩샤오핑에 대한 태도 변화를 읽고 정지 작업을 해놓은 저우언라이였다. 덩샤오핑의 편지로 다시 한번 마오쩌둥의 태도가 확인되자,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 구제를 위한 적극적인 행동에 나선다.

 

 장시江西성에 당 중앙의 명의로 연락해 성 정부의 연락해 덩샤오핑의 당 조직 내 활동을 복권시키고 덩샤오핑에 대한 감시를 당장 중지하도록 했다. 또 덩샤오핑이 편지에서 원했듯 주변 방문 조사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했다. 이전의 비서들도 덩샤오핑에게 가 다시 덩샤오핑을 보필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이 같은 저우언라이의 행동에 장칭江青 등 사인방도 가만히 손 놓고 있지는 않았다. 저우언라이가 극좌에 대한 비판을 우경화, 수정주의라고 비판했다.

 

 결국 사인방의 이 같은 반대에 덩샤오핑은 장시성에 머물 뿐 정치의 본고장 수도 베이징北京에 복귀하지는 못했다. 이때 저우언라이는 자신은 물론 마오쩌둥의 건강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낀다. 실제 스스로 소변에서 이상 징후를 발견한다. 또 마오쩌둥이 심장 경색으로 쓰러지는 일이 발생한다. 마오와 자신의 뒤를 과연 누가 이을 것인가? 사인방에게 중국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는 게 저우언라이의 판단이었다.

 

 ‘그래 덩샤오핑을 좀 더 빨리 복권시켜야 한다.’ 당시 저우언라이의 결심이었다. 1972년 12월 17일 저녁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의 찾아 면담을 한다. 그리고 당시 연금 중이던 많은 간부들의 복권에 대해 논의한다. 구이린桂林의 탄즌린谭震林에 대해 이야기하자, 마오쩌둥은 “그는 좋은 동지였다. 당장 복귀시켜야 한다”고 동의했다. 탄즌린은 린뱌오에 대한 비판을 했던 ‘2월 역류’ 사건으로 베이징에서 쫓겨나 구이린에서 연금 상태에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이와 함께 몇몇 동지들과 함께 덩샤오핑 복권을 위한 논의를 해 덩샤오핑을 부총리로 복권시키자는 건의서를 쓰도록 한다. 저우언라이는 해당 건의서를 마오쩌둥에게 보고를 했고 마오쩌둥의 허락을 받는다. 바로 1972년 12월 27일의 일이었다.

 

 드디어 덩샤오핑이 부총리로 복권된 것이다. 1973년 2월 당 중앙은 덩샤오핑 일가를 정식으로 베이징에 되돌아오도록 조치한다. 3월 상순에는 덩샤오핑 부총리직 복권 안을 정치국 회의에서 정식으로 논의한다. 당연히 장칭 등 사인방의 강한 반발이 있었지만, 덩샤오핑의 복권은 이미 마오쩌둥의 허락을 받은 사안이었다. 누가 감히 끝까지 방해를 할까. 3월 10일 덩샤오핑 부총리 복권 안은 정식으로 정치국에서 통과됐고, 저우언라이는 관련 사실을 덩샤오핑에게 보고해 동의를 얻는다.

 

 3월 10일 당 중앙은 전국에 비로소 ‘덩샤오핑 동지의 당 조직생활과 국무원 부총리 직무 복귀의 결정에 대한 통지’를 하달한다. 1973년 3월 10일 덩샤오핑邓小平이 드디어 다시 중국 정가에 우뚝 섰다. 저우언라이周恩来의 숨은 노력이 드디어 빛을 본 것이다. 저어언라이는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덩샤오핑을 국제 무대에 소개하기로 결심한다.

 

 4월 12일 저우언라이는 캄보디아 총리의 방중 일정에 맞춰 인민대회당에서 대규모의 성대한 연회를 연다. 각국의 기자들을 초청했다. 저우언라이가 기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캄보디아 총리가 아니었다. 바로 덩샤오핑이었다.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에게 주요 역을 하도록 맡겼다. 세계는 지난 6년간 중국 정가에서 사라졌던 덩샤오핑의 화려한 등장에 깜짝 놀랐다. 연회가 끝나고 전 세계 신문 머리기사를 장식한 것은 캄보디어 총리의 방중 사실이 아니라 ‘덩샤오핑의 복권’이었다.

 

 세계 각국의 보도사실을 보고받은 저우언라이는 비로소 안심의 한숨을 내쉰다.

이 순간 저우언라이의 머리에는 어떤 생각이 떠올랐을까? 이제 비로소 전심으로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됐다? 혹 드디어 문화대혁명의 구덩에서 중국이 빠져나올 힘을 얻었다?

 

 모두 맞을 수 있다. 중국 당사가 추정한 생각은 덩샤오핑에 대한 저우언라이의 무한한 애정을 보여주는 것이다. 중국 공산당사 출판사가 편찬한 ‘중남해 인물춘추’는 저우언라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전하며 이어 덩샤오핑이 장시 유배를 떠날 때를 언급한다.

 

 당사에 따르면 저우언라이는 덩샤오핑 부부가 장시江西로 유배되는 날 장시성 당 위원회에 직접 전화를 한다. “덩샤오핑 동지는 다른 동지와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유념하시오. 장시성 농촌으로 내려가는 것은 진정 단련을 위한 것이오. 절대 무리한 노동을 하도록 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라오”

 

 이와 함께 저우언라이는 장시성 당 위원회가 “덩샤오핑 동지를 인적이 드물고, 교통이 불편한 산속에 유배하겠다"라는 제안을 거부한다. 오히려 난창 교외를 제안하면서 산보도 하고 안전도 보장받을 수 있는 2층의 독채를 제공하도록 한다.

 

 당사는 이 같은 저우언라이의 행동을 언급하면서 “린뱌오에 의해 위기에 몰린 덩샤오핑의 병풍 역할을 해 장래 덩샤오핑의 복권에 희망과 보증이 됐다"라고 평했다. 4월 12일 인민대회당의 전경은 전 세계 기자들의 묘한 호기심을 자극하기 충분했다. 한 기사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인민대회당, 이 중국 권력의 대전당 한 편에 문화대혁명의 영웅들이 아직 건재하게 서 있다. 다른 한편에 그들에 의해 모든 권력을 박탈당했던 덩샤오핑이 의연하게 서 있다. 양측은 서로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사실 행간에 기자가 쓰고 싶었던 것은

문화대혁명의 방향이 흔들리고 있다. 본격적인 새로운 형태의 권력투쟁이 시작됐다.

 

는 말이었을 것이다. 정확한 예측이었다. 장칭江青 등 사인방이 어찌 그리 호락호락할까. 덩샤오핑의 새로운 고난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저우언라이 역시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저우언라이는 다시 한번 덩샤오핑의 권위를 확고히 하기 위해 또 다른 준비를 한다.

 

 바로 이어진 중공중앙 정치국 회의를 통해서다. 회의는 5월에 예정돼 있었다. 당시 덩샤오핑은 부총리로 복귀는 됐지만, 아직 정치국 국원은 아니었다. 본래 부총리는 정치국 국원이어야 했다. 저우언라이는 마오쩌둥毛泽东에게 이 같은 점을 언급한다.

 

 허를 찔린 사인방은 즉시 반대 활동에 나선다. “덩샤오핑이 정치국에 들어오면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사태를 주도할 수 있겠는가?” 장칭의 우려였다. 캉성康生도 적극 반대를 한다.

8월 중국 공산당 제10차 전당대회가 열린다. 이어진 10기 1중전회에서 덩샤오핑은 겨우 중앙위원이 된다. 사실 이때 장칭 등 사인방은 더욱 결속을 했고, 비로소 주변에게 ‘사인방’이라 불리게 된다. 장칭 등 사인방은 힘을 합쳐 정치국 중앙위원에 자기 사람들을 대거 진입시킨다. 저우언라이 등은 덩샤오핑을 살리는 대신 정치국 중앙위원 자리를 적지 않게 양보한 것이다.

 

 사뭇 문혁 사인방의 발호에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이 무릎을 꿇은 듯한 형세였다. 그러나 진정한 승자가 누군지 드러나는 것은 3개월이 지나서였다. 12월 12일 마오쩌둥은 자신의 서재에서 정치국 회의를 연다. 이 정치국 회의에서 마오쩌둥은 선포를 한다. “오늘 내 군사 한 명을 청했소. 바로 덩샤오핑 동지요. 모두에게 통지하기 바라오. 덩샤오핑 동지를 정치국 위원으로, 군위 위원이 됐소. 정치국은 당과 국가의 동서남북 중앙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기구요. 여기에 비서장 직을 더하겠소. 아니 그대는 이런 게 필요 없지. 그저 참모장 역을 맡았다고 생각하시오.”

 

마오쩌둥은 담배를 한 모금 피운 뒤 다시 말을 이었다. “일부 그(덩샤오핑)을 두려워하기도 한다고 알고 있오. 그는 과감한 면이 있지. 여러분의 오랜 상사이기도 하지. 오늘 내 그럴 다시 불렀소. 아니 정치국이 다시 불렀소. 내 개인이 부른 것이 아니오.”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사인방은 모두 입을 다물고 감히 한숨도 내쉬지 못했다고 당사는 전하고 있다. 저우언라이는 12월 22일 자 직접 마오쩌둥의 통지를 써 전 당 조직에 하달한다.

“당, 국가 전 유관 기관에 통지한다.

 

 마오 주석의 뜻을 받들어 중국 중앙은 다음과 같이 결정하였다. 덩샤오핑 동지는 정치국 위원으로 중앙 영도 업무에 참여한다. 이 같은 사실은 10기 2중전회를 통해 다시 인증한다. 덩샤오핑 동지는 군사 위원회 위원으로 군사 영도 업무에 참여한다. 이상 통지 끝.

 

1973년 12월 22”

 이렇게해서 덩샤오핑의 복권은 확고한 것이 됐다. 그 뒤 덩샤오핑은 다시 권력의 핵심에서 밀려나지만, 그렇다고 권력의 중앙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도 않았다. 오뚜기 덩샤오핑은 이렇게 만들어 진 것이다.

박윤현 afeconomy@haidongzhoum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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