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우언라이 인물탐구 <1> 마오쩌둥 1인 천하시대 중난하이 풍운의 인물

2022.12.26 10:55:58

중국의 비밀을 감춘 곳, 바로 중난하이(中南海)다. 그 중난하이 풍운의 역사가 바로 신중국의 역사다.

 

중국의 모든 것이 결정되는 곳, 바로 중난하이(中南海)다.  남쪽 바다 한가운데라니? 구중심처보다 더 은밀한 맛이 있다. 중난하이는 사실 중해와 남해를 함께 부르는 명칭이다. 베이징 자금성 서쪽에 인공으로 만든 큰 호수  두 곳이 바로 중해와 남해다. 과거 명청시대 때부터 황제의 쉼터, 귀족과 고관대작들의 거처가 있던 곳이다. 그만큼 경치도 아름답다. 

 

 

청나라가 망한 뒤 중화민국 정부가 1925년 10월 10일 자금성을 고궁박물관으로 시민들에게 공개키로 하면서 중난하이는 자금성을 대신해 중국 정치의 중심지가 된다.
그 순간, 중난하이의 평지풍파도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각 지역 정치 세력은 물론이고, 외세 일본까지 참여한 소위 '중난하이 왕좌의 게임'이 벌어진 것이다.

 

마오쩌둥(毛泽东)의 공산당은 지방 군벌이 득세하면서 정치 중심의 지위가 흔들린다.  하지만 그도 잠시일 뿐. 공산당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중난하이의 정치적 지위는 더욱 공고해진다. 베이징이 공산당 천하 중국의 수도가 됐고, 마오쩌둥을 비롯한 중국 공산당 건국공신들은 중난하이에 살기 시작했다.
 

역시 피할 수 없는 것이 '왕좌의 운명'이다. 중난하이의 풍파도 다시 일기 시작했다. 1957년 대약진운동 시작, 1960년 중소관계 분열, 이어지는 3년간의 자연재해, 1965년부터 10년간의 문화대혁명.
중난하이에 거주한 공산당 초기 공신들도 이 풍파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서로 죽고 죽이는 피바람이 일었다.

 

 

덩샤오핑(邓小平)이 전면에 나서면서 중난하이는 그나마 안정을 되찾았다. 이른바 '집단지도체제'는 이 같은 안정의 산물이었다. 그런데 덩샤오핑 개혁개방 뒤 40여 년이 흐른 오늘, 중난하이가 다시 요동치고 있다. 시진핑(习近平) 주석의 천하가 되면서 중난하이 권력 지형이 다시 흔들리고 있다.  중난하이에 소위 1인 천하 시대가 다시 도래한 것이다. 

 

그럼 다른 이들의 권력은 어떻게 됐을까?

 

중난하이에 사는 당 중앙 지도자들은 알겠지만, 침묵만 지키고 있다.  아마 수십 년이 지나 다시 사태가 바뀌고 나면 우리도 알게 될 것이다. 지금에서야 우리가 마오쩌둥 1인 천하 시대의 중난하이 속사정을 알 수 있듯 말이다.

그럼 과연 마오쩌둥 1인 천하 시대의 중난하이는 어떠했을까?
당시 풍운을 보면, 지금 중난하이 풍운의 향방을 알 수 있지 않을까?

 

国破山河在, 城春草木深。
guó pò shān hé zài, chéng chūn cǎo mù shēn 。

 

정권은 바뀌어도 산하는 남으니
성 안의 초목 다시 봄을 맞으리


두보의 시구처럼 본래 남은 것을 통해 지난 것을 알고, 지난 것을 통해 오는 것을 아는 법이다.

마오쩌둥 1인 천하의 중난하이는 총칼 없는 전쟁이 벌어지던 곳이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을 거치며, 권력암투로 인해 발생한 직간접적인 희생자 수는 공산당이 총과 칼로 국민당, 일본군과 싸웠을 때보다 더 많았다고 한다. 중국 공산당사는 마오쩌둥 외에 중난하이 주요 간부로 50명의 지도자를 꼽는다. '신중국인물열전'은 바로 이들의 이야기다.
그 첫째가 바로 저우언라이(周恩来) 총리다.

 

 

저우언라이, 문화대혁명 찬성 또는 반대? 
난세의 돌기둥(流中砥柱)?


지난 2018년 3월 5일은 현대 신중국의 명재상, 저우언라이 총리의 탄생 120주년 기념일이었다.
시진핑 주석은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좌담회를 열고 "저우 총리의 청렴을 배우자"고 강조했다. 당시 마오쩌둥에 대한 홀대를 생각할 때 좌담회는 파격적인 규모였다. 탄생 120주년이라는 숫자의 의미도 컸지만, 그보다 저우언라이의 중국 내 독특한 지위 때문이다.

 

저우언라이는 1898년 3월 장쑤(江苏)성 화이안(淮安)에서 태어났다. 당대 중국에서 비교적 부유한 집안이어서 일찌감치 일본 와세다 유학을 했고 유럽 유학도 했다. 학력만 보면, 왜 저우언라이가 마오쩌둥 밑에 있었는지 이해가 안 될 정도다.

우리의 이야기는 1966년에서 시작한다. 

 

 

당시 중국은 대약진운동 실패 이후 북방 지역에 가뭄이 들어 인민들이 고통이 극심할 때였다. 
안 그래도 어려운 경제인데 말그대로 설상가상의 상황이었다. 저우언라이는 당시 확고부동한 총리였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면 농업과 산업 생산을 격려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중난하이에는 가뭄보다 더 고통스러운 정치 피바람이 조금씩 불어오고 있었다.
 

장성배 dayoff91@kochina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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