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한국삼성의 역사 ①

2020.06.29 00:41:34

“하고 싶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훗날의 결과가 그 이유를 알게 해 준다”

 

“하고 싶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다.  훗날의 결과가 그 이유를 알게 해 준다”

 

흔히 골이 깊으면 산이 높다 한다. 고난이 쓰면, 열매는 더욱 달다 한다.

 

하지만 방황이 길어 결심이 옳았다고 하지는 않는다. 긴 방황의 경험들이 훗날 유익한 결정을 하는 데 도움이 됐다고도 하지 않는다.

 

그게 일반인의 정서이고 생각이다. 누구도 방황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런데 삼성그룹을 세운 이병철은 달랐다.

 

일본에서 돌아온 이병철은 돼지도 키워보고, 고급 야채도 재배해본다. 하지만 농사일이라고 해보지 않은 이병철이 지시만 해서 하는 농사가 성공할리 없었다.

 

자연이 일들이 흐지부지되고 이병철은 당대 돈 많은 한량들이 그러했듯 노름에 빠진다.

 

그렇게 낮에 나가 밤 늦도록 골패를 하다 달밤에 그림자와 돌아오는 일상을 보내던 날, 이병철은 홀연 달빛에 이끌려 잠든 아내와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돌연히 깨닫는다.

 

“아, 내가 이래서는 안된다. 집안 일, 농사 일이 아니어도 뭐든 해야 한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병철의 머리 속에 떠오른 것이 사업이었다.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요즘 같은 사업은 없었다. 아니 없었던 것이 막 생기던 시점이었다.

 

무슨 말인가? 조선 왕조시대와 일제 치하의 식민 조선은 두 가지 측면에서 경제 사회에 큰 변화가 있던 시기다.

 

조선 왕조시대만 해도 돈을 버는 것은 장사이고, 사업이라면 다 나랏일을 하는 것이었다.

 

철도를 놓고, 생필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것 등등 요즘 소위 말하는 산업생산 대부분이 국가의 손에 이뤄졌던 시절이다. 책상은 물론 도자기까지 나라가 지정하는 상인들이 만들어 전국에 공급을 했다.

 

이런 제도는 이후 자연스럽게 문제에 부딪친다. 늘어나는 인구의 수요를 충당하기에 너무 생산력이 부족했다. 국력이 떨어지는 게 당연했다. 결국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원인이 된다.

 

일본은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서구적 경제생산 체계를 도입한 나라다. 사업을 떼어 민간에게 이양을 했고, 이들 민간 사업자들은 놀라운 효율성을 자랑하고 있었다.

 

또 식민지 한국을 비롯해 중국, 특히 만주와 상하이, 광둥 등지에서 서구 사업가들과 함께 경쟁을 하기 시작했다.

 

자연히 식민지 조선에서도 일본 사업가들의 밑에서도 또 개별적으로 사업을 하는 상인들이 생기고 있었다. 물론 선에서도 전국의 물자공급망을 장악하고 매매를 통해 돈을 벌던 지역 상인 조직들이 있었다. 이런 한국 토종 자본들이 조금씩 새로운 사업 구조에 눈뜨기 시작하는 중이었다.

 

 

 달빛 비친 아이들의 얼굴을 보고 이병철은 이런 사업을 해야 한다고 결심했다고 한다. 스스로도 오랜 방황 끝의 결심이었다고 했다. 어쩌면 많은 이들이 그 결심하려고 방황이 너무 길었다고 치부할 수도 있다.

 

앞에 언급했지만 여기서 이병철 사고의 독특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이병철은 당시 결심이 남달랐고, 남달랐던 이유가 방황이 길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결심이 남다른 것은 어찌 아느냐고?

 

 이병철은 결심이 남다르면 반드시 결과로 나타난다고 했다. 자서전의 그의 고백을 보자. 좀 길다. 먼저 자신의 한 언론 인터뷰 내용을 소개한다.

 

 “어떤 인생에도 낭비라는 것은 있을 수 있다. 실업자가 10년 동안 무엇 하나 하는 일 없이 낚시로 소일했다고 치자. 그 10년이 낭비였는지 아닌지, 그것은 10년 후에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낚시를 하면서 반드시 무엇인가 느낀 것이 있을 것이다. 실업자 생활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견뎌 나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내면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

 

 헛되게 세월을 보낸다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남는 것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헛되게 세월을 보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 훗날 소중한 체험으로 그것을 살리느냐에 있다.”

 

 이병철은 이런 생각에서 일본에서 돌아온 뒤 생활에 조금의 후회도, 아쉬움도 없다고 단언했다. 역시 자서전의 내용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도쿄에서 돌아온 후의 2~3년이 결코 낭비는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동안 무엇인가 생각이 여물고, 결국은 상업을 일으켜야 한다는 뜻을 갖게 했던 것이다. 입지를 위한 모색이었다고 할 수 있다.”

 

 

황혜선기자 hhs@kochina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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