卷入战争漩涡的郑周永,承揽了美军的所有建筑工程,逐渐扩大了公司的规模。到战争结束时,现代建设已成长为韩国建筑业的“中坚企业”,处于中小企业和大企业之间的过渡期。战争结束之后,为稳定社会秩序,加快经济发展,韩国政府必会增加基础建设方面的投资,所有人都认为现代建设将稳稳地走上成为大企业的成功之道。但好事多磨。老天爷给郑周永的考验,远远不止前几次。
1953年停战协定签定后,郑周永承揽了韩国政府的国家重建工程。1953年4月,现代建设承揽的第一个大规模重建工程,就是高灵桥维修工程。高灵桥是大邱市通往居昌市的咽喉要道,有助于发展地区经济。最早修建于1935年,也就是日本殖民时代。当时,高灵桥的水上构造已经全部被炸毁,只剩下桥墩。战后,韩国为了维修高灵桥,进行了全国性的建筑工程招标。当时,高灵桥维修工程是最大规模的国家项目,规定工期为2年。
1979年,现代集团的名誉会长郑周永访问了沙特阿拉伯公房的建设现场。
郑周永为了承包这项工程,首先聘请了相关人士。现代建设虽然通过美军的各种建筑工程,积累了不少建设经验,但从来没有参与过如此大规模的国家项目。因此,郑周永聘请了曾任内务部土木局局长的崔京烈做自己公司的顾问,并请来了一位名叫金永弼的技术员做工地现场事务所所长。崔京烈得到了制造这座桥梁桥体的特许权,对交通部所有大型施工设备非常熟悉;金永弼则在日本多次参加架桥工程,对架桥有一定的实际经验。
有了这样的人才,现代建设稳稳地获得了高灵桥工程的施工权,并签定了合同。郑周永做梦也想不到,这工程将成为一个噩梦。工程刚一开始,现代建设就遇到了困难。战争结束的时候,韩国国内的经济形势非常严峻,政府为了恢复建设,连续不断地扩大财政投资和融资,加大向市场投放货币,贬低货币的价值,物价却涨得飞快。之前,郑周永利用通货膨胀,从美元上得到了好处;但现在的客户是韩国政府,情况就恰好相反了。
1953年,郑周永会长拿下了第一个大规模建设工程,负责维修大邱市与巨昌市之间的高灵桥。
另外,高灵桥有的桥墩严重损坏,许多构件都落在了水中,必须先清理现场才能施工。然而,洛东江的水位四季变化明显,冬季枯水期,水很浅,不少地方都露出了河床,可是一到夏季,河水猛涨,流速极大,工程的难度可想而知。不仅如此,现代建设当时的装备只有一台20吨重的起重机、一台搅拌机和一台固定式压缩机。虽然工地环境非常恶劣,现代建设的工人们尽力修好了桥墩,但第二天下雨,洪水就把刚修好的桥墩给冲毁了,一切只好重来。“真的没有办法了。我们放弃吧。”现代建设的高级管理员们试图说服郑周永。工期不断延长,物价一直膨胀。现代建设面临财政危机。
1982年,郑周永会长参加了“韩美建交100周年纪念爬山活动”,与美国大使握手。
但郑周永到最后也不屈服,没有放弃高灵桥工程。“一个人勤奋,能够养家糊口,但想要成大事,必须要守信,而信任正如一棵树,是一点一点长大的。”后来,郑周永在其《回忆录》中表示:“当时我想,遇到这样的挫折就放弃,往后还能成什么大事?”
为解燃眉之急,郑周永卖掉了现代建设的大楼等固定资产,紧急融通资金,按时完成了高灵桥工程。1955年底,高灵桥修复工程如期完工。最后结算,高灵桥工程竟赤字6500余万元。不过,高灵桥工程给现代建设留下的,不只是巨额的债,还给了客户的绝对信任。韩国政府的内务府对郑周永给予了高度的评价,并给了他奖状。颁奖的时候,内务府长官是这样说的:“虽然面临物价上涨等各种困难,(郑周永和现代建设)克服了这样的挫折,没有只顾利益,以诚信的态度坚持完成了工程……”
现代建设到1975年才能还清所有的债。可见,高灵桥工程对现代建设的打击多么的致命。郑周永背上了20多年的巨债,却得到了信任。利益和信任,孰轻孰重呢?时间证明了一切。
笔者 淸露 图片摘自 现代集团
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12)
하늘의 단련은 끝이 없다
“사업의 진정한 성공 요인은 ‘신뢰’다. 시련은 그것을 지킬 수 있는지 묻는 질문이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정주영은 미군 공사를 수주하면서 사업을 키운다. 전쟁 막바지 정주영의 현대건설은 말그대로 중견건설사로 성장해 있었다. 전쟁도 끝나고 이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만 하면 되는 듯 했다. 그러나 세상의 좋은 일은 그렇게 쉽게 오는 법이 아니다. 아직 하늘의 단련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그것도 아직 많이 말이다.
전쟁이 끝나고 정주영은 국가 재건 사업에 적극 뛰어든다. 역시 미군 부대 공사를 하면서 쌓은 경험이 크게 도움이 됐다. 첫 번째 대규모 공사가 1953년 4월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따낸 고령교 보수 공사다. 고령교는 낙동강 위에서 대구와 거창을 연결하는 다리였다. 고령교가 처음 건설된 것은 1935년 일제 시대 때다. 대구와 거창을 연결하면서 생활권을 하나로 묶어 내 지역 경제에 큰 역할을 해왔다. 이 다리가 전쟁 통에 폭격을 받아 완전히 무너져 내린 것이다. 겨우 몇 개의 교각만 남았다.
한국정부는 전후 복구를 생각해 이 다리를 복구하기로 결정하고 입찰을 벌였다. 공사기간은 2년이었다. 다시 한국 정부가 발주한 사업으로는 최대 규모의 사업이었다.
현대건설을 이 사업에 입찰을 하기 위해 인재부터 영입했다. 미군부대의 다양한 공사를 해봤지만 현대건설로서도 이 정도 대규모 공사를 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무부 토목국장을 지낸 최경렬(崔景烈)을 고문으로 초빙했고, 일본에서 교량 건설 경험이 있던 김영필(金煐弼)을 상무로 영입했다. 최경렬은 일본 경도제국대학 토목과 출신으로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총독부 토목기사로 한강 인도교 설계에 참여했던 인물이다.
공사는 당연히 현대건설의 손에 떨어졌다. 하지만 그게 불행이 시작이라고 정주영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악재는 안팎으로 다 있었다. 우선 불안한 한국 경제가 문제였다. 전쟁이 막바지에 치닫으면서 물가가 폭등하기 시작했다. 악성 인플레이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화폐가치가 급락했다. 솔직히 정주영은 그동안 미군 부대 공사를 하면서 달러만 받아 이 같은 원화가치 하락 인플레이션의 수혜만 받았다. 이제 정말 인플레이션의 문제가 무엇인지 피부로 느끼게 된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교령교 공사 현장에도 문제가 있었다. 당시 낙동강의 특성은 강물의 수위가 하루 아침에도 변한다는 것이었다. 비만 조금만 와도 강물이 넘쳤다. 최악의 공사 현장이었다. 특히 현대건설의 장비는 열악하기만 한 것이었다. 작은 크레인 하나가 전부였다. 다리 교각을 작은 크레인으로 인부들의 인력을 더해서 겨우 올려 세워 놓으면 다음날 물이 불어 교각이 무너졌다. “도저히 방법이 없습니다. 포기합시다.” 회사 임원들이 정주영에게 매달렸다. 공사 기한은 늘어나고, 물가는 하루가 다르게 치솟았다. 즉 공사를 해봐야 손해만 보는 상황이 악화되고 있었다.
그러나 정주영은 끝을 굽히지 않았다. “부지런하다면 먹고는 살겠지만, 큰 일을 하기 위해서는 신용을 지켜야 한다. 신용은 나무처럼 자라는 것이다”며 버텼다. 이 정도를 성공하지 못하고 포기를 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다고 훗날 회고록에서 밝힌다.
정주영은 현대건설의 사옥부터 가진 모든 것을 팔고 빚까지 져 사업을 끝낸다. 고령교 공사는 1955년 5월을 끝이 난다. 2년 공사기한은 넘기면서 정주영에게 남긴 것은 빚뿐이었다. 아, 고 정주영 명예회장의 회고록에는 고령교 공사로 남은 게 하나가 더 있다. 당시 내무부 장관이 자신의 이름으로 준 표창장이다. 문구가 재미있다.
“물가 앙등 기타 여러 가지 난관과 애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극복하고 타개하여 채산을 돌보지 아니하고 성심성의 좋은 성적으로 준공하여….”
정주영의 현대건설이 빚을 모두 갚은 것은 무려 20년이 지나서였다. 고령교 공사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주영은 빚을 낸 대신 신뢰를 얻었다. 과연 무엇이 더 큰 것일까? 그것은 훗날의 결과가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