对于大部分的韩国人而言,朝鲜战争是一场大灾难。以坚强的意志在维修汽车业取得成功的郑周永,被卷入无情的战争之中,也只能面临不知何时会死去的恐惧。一无所有度过艰难的战争岁月,岂不是很痛苦?但郑周永与众不同。经历了无数次挫折的郑周永,从战争中看到了新的事业机会,尤其在建筑行业。朝鲜战争爆发之前,美8军首尔地区司令部接手了对韩国社会的控制权,而这司令部本就是“现代土建社”的主要客户,郑周永与美军原本就有事业合作关系。再加上,二弟郑仁永担当了美8军工兵部队负责人的直属翻译。战争期间能够有这样的关系,可以说,郑周永三生有幸。
峨山”郑周永会长正在与美军签订工程合约。(2011.03.10)
但郑周永只是运气好吗?没有任何实力,光靠运气吗?他成功修整美军墓地的故事,证明了他的成就并不是光靠运气的。面对难以解决的问题,郑周永总是以不同的角度思考,最终找出机智的解决方案。美军第8军收到联合国工作人员来参拜的消息,负责人立马找郑周永修整墓地。“尽量让它看起来绿意盎然。”当时是严寒的冬天,釜山虽在南方,气候比较温暖,下雪量也较少,但也没法将冬季枯黄的草地染成绿色。另外,周围四季常青的树木,受到战火的摧残,不见踪影已久。所有人都摇着头说“没办法”的时候,郑周永想到了一个主意。“对啊,种小麦吧!”当时,小麦是常见的谷物。就算是严冬,小麦也能发出绿芽。刚好在墓地附近,有一片麦地。郑周永将所有的小麦全部买下来,将正在发芽的小麦重新栽种在墓地里,虽然不及草坪好看,但本来光秃秃的墓地焕然一新,有了绿意怏然的春景。看到釜山大渊洞美军墓地如今完美的草坪,很难想象几十年前郑周永种下小麦的情景。郑周永就是这样的人物。对他来说,没有一件事是不可能的,只是还没想到合适的方法而已。
第34届美国总统艾森豪威尔。1952年,当选为美国总统的森豪威尔决定访韩,郑周永会长拿下了为艾森豪威尔修建云岘宫的工作,将所有的内部传统设施都改装成了西方式设施。
1952年12月,通过修建美军宿舍,郑周永再一次证明了他坚持不懈的意志。当年,艾森豪威尔当选为美国总统。在竟选时,他向选民夸下海口,要以和平的方式结束朝鲜战争,为了实现这一诺言,他决定亲自去朝鲜半岛一趟。美军第8军的将领们决定将总统的下榻地点定在云岘宫。郑周永拿下的正是为艾森豪威尔修建云岘宫的工作,从卧室、厕所到供暖设施,都要改装成符合美国人生活习惯的西方设施。
但最大的问题不是这些,而是时间。战争期间,总统下榻的地点属于极度保密事项,所以美军给郑周永的工程时间很短。加上,郑周永不了解西式设施,所以他只好翻遍整个首尔市,找出坐便器、浴缸、暖气等二手西方设备,好好研究了一番,再改装成新的设施。材料备齐了,郑周永便一天24小时昼夜不停地施工。如果艾森豪威尔对宿舍满意,那么郑周永的事业日后定会一帆风顺;如果不满意,那么多年来他与美军建立的关系就会变得冷淡,甚至惨淡。
也就是说,郑周永事业的成败,就在于此。结果如何呢?当时,韩国的李承晚总统主张继续攻打、实现统一;艾森豪威尔总统则希望停止战争,进入休战。这与当时朝鲜金日成主张续战,中国彭德怀主张休战的情形相似。无论怎么说,艾森豪威尔必定是怀着沉重的心访问的韩国。事实上,艾森豪威尔回避与李承晚长时间会谈,只是在首尔美军司令部与他短暂地碰了个面。那么艾森豪威尔对宿舍的评价如何呢?
虽然无法确定艾森豪威尔本人的反应,但艾森豪威尔回到美国之后,从美军做出的“现代,第一”的评价中,可以猜到一二。当美第8军负责人冲着郑周永直竖大拇指的时候,现代建设的事业日后蒸蒸日上的期待,就成了现实。当时,美军进行了大规模施工,有关建筑行业的工程很多。另外,美军用美元支付工程贷款,当时汇率一直在上升,刚开始拿到工程时,是1美元1千韩元的汇率,工程收尾的时候上升到1美元1千5百韩元,郑周永每次都能赚到不只两倍的工钱。
联合国纪念公园。当年,郑周永会长种下小麦,让冬季光秃秃的墓地一下子绿意怏然。
但所谓“好事多磨”。1953年停战协定签定后,大部分美军撤到了日本,韩国政府接手了国家控制权。郑周永承揽了一些韩国政府的紧急修复工程。其中,高灵桥工程是最大规模的工程,也是郑周永第一次出现巨额赤字的工程。
笔者 淸露 图片摘自 现代集团
现代集团与创始人郑周永(11)
준비된 자는 모두가 어려울 때 기회를 잡는다.
한국전쟁은 거의 모든 한국인에게 정말 불행이었다. 우리 주인공 정주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주영이라고 어찌 언제 어느 때 죽음을 맞을지 모르는 전쟁의 고통을 피해 갈까? 하지만 정주영은 보통 사람과 달랐다. 오랜 기간 되풀이된 시련을 견뎌온 그에게 한국전쟁은 새로운 기회가 됐다. 무엇보다 임시방편성 건축작업이 넘쳐났다. 모두가 알고 있듯 한국전쟁 직전까지 그는 미군 부대의 건설용역을 도맡아 하는 건설업체를 설립했었다. 전쟁이 터지고 미군은 대한민국의 모든 것을 결정하던 곳이었다. 전쟁과 함께 영어에 능통하던 동생 정인영이 미 8군 그것도 공병대 수장의 통역관으로 일하게 된 것이다. 정말 대박으로 운이 터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것이 정주영은 정말 운만 좋았던 것일까? 능력도 모자란 데 운만 좋아서 된 것일까? 분명히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가 바로 미군부대 무덤 장식 공사의 일화다. 정주영은 아무도 해답을 생각하지 못할 때 그만의 독특한 사고로 해결법을 찾았다. “가능한 푸르게 보이게 해달라.” 한국전쟁에 희생된 미 장병의 묘지를 단장하는 공사를 맡기며 미 8군 최고 사령부가 한 당부다. 때는 한겨울, 한국의 부산은 비교적 온난한 기온의 땅이고, 눈도 적게 왔지만 그렇다고 누런 잔디를 푸르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사철나무가 있었지만, 전쟁통에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수준이었다. 정말 모든 사람이 방법이 없다고 고개를 저을 때 정주영의 머리에 벼락처럼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래 보리를 가져다 심자.’ 보리는 당대 비교적 흔한 곡물이었다. 쌀이 부족한 시절 보리로 연명하는 이들이 많았다. 보리는 엄동설한에 새움을 틔워 파릇파릇하게 자라는 식물이었다. 또 도처에 널린 게 보리였다. 정주영은 당장 주변 보리를 대거 매입해 보리로 묘지를 장식했다. 물론 잔디보다 보기 좋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엄동설한에 묘지는 당장 푸르게 바뀌었다. ‘아 지금 이 잔디의 자리엔 보리가 심어졌었구나!’ 지금의 부산 대연동 미군 묘지를 보는 이라면 상상도 하기 힘들 것이다. 그런 정주영이었다. 그에겐 불가능이란 없었다. 다만 생각이 미치지 못할 뿐이었다.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2년 12월 서울 미군 부대 숙소 공사 건 역시 정주영의 이 같은 면모를 잘 보여준다. 당시 공사는 당대 미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방한하는 아이젠하워가 당선자를 위한 숙소를 마련하는 공사였다. 미군은 아이젠하워 숙소를 장덕궁 앞 운현궁으로 정했다. 정주영이 맡은 공사는 운현궁내 아이젠하워가 머물 수 있도록 숙소를 미국식으로 개조하는 일이었다. 화장실, 세면대 난방장치의 설치 등이 정주영이 맡은 공사였다.
문제는 당시 전쟁통에 아이젠하워 숙소가 극비였다는 것이다. 정주영에게 공사를 하도록 통보된 기간도 그래서 대단히 짧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양변기 등 당시 정주영도 듣도 보도 못한 물건들이 많았다. 고민 끝에 정주영은 서울시 있는 양옥을 다 뒤졌다. 또 그 집 인근 고물상을 뒤져 양변기, 욕조, 보일러 등의 자재를 찾아냈다. 그렇게 구한 건축자재들을 닦고 다듬어 공사에 착수한다. 숙소가 아이젠하워의 마음에 든다면 말 그대로 만사형통이고, 아니면 앞으로 미군과 일을 하기 쉽지 않을 수 있다. 말 그대로 정주영의 운명을 가늠하는 공사였던 셈이다.
결과는 어땠을까? 당시 한국의 이승만 대통령은 북진 통일을 주장하고,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내심 휴전을 바라고 있었다. 참 당대 북한의 김일성이 적극적인 공격을 주장하고, 펑더화이가 휴전을 주장했던 것과 묘하게 닮았다. 어쨌든 한국을 찾는 아이젠하워의 심기가 그리 편치 않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실제 아이젠하워는 이승만 한국 대통령을 서울 미군 사령부에서 잠시 얼굴만 봤을 정도다. 그런 아이젠하워가 숙소에 대한 평가는 어땠을까?
아이젠하워의 평가는 기록에 남아있지 않지만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귀국한 뒤 미군의 반응은 정주영 회고록에 남아있다. 그 것은 ‘현다이, 넘버워’이라는 것이었다. 현대건설의 승승장구에 대한 약속이기도 했다. 당대 미군은 가장 많은 공사를 발주하는 기관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공사대금이 달러로 지급됐는데, 당시 환율은 자고 나면 치솟았다는 점이다. 공사를 맡을 때 1달러당 1000원이었다면 공사가 끝날 때면 1500원으로 올라 있었다. 정주영은 공사를 하면서 같은 달러의 돈을 받아도 공사가 끝날 때면 그 돈이 몇배로 불어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모든 일이 어찌 좋은 일만 있을까? 한국전쟁이 끝나고 한국 정부의 역할이 커지면서 정주영의 현대건설은 뜻하지 않는 시련을 겪게 된다. 대표적인 공사가 당대 한국정부가 발주한 최대규모의 공사라는 고령대교 공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