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개를 줍는 게 얻는 것인데, 그게 바로 지는 것의 시작이요, 부채(負債)의 시작이다. 묘한 게 한자다. 그럼 이기는 건 무엇일까. 그것은 버리는 것이다. 떠나는 것이다. 최소한 떠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멀리 강을 건너 바다를 건너 떠날 수 있는 것이다. 이길 승(勝)이 그렇다. 한자에서 이긴다는 건 떠나는 것이다. 배를 운전해 떠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것이다. 고기 육(肉) 옆에 돋아날 생(生)을 쓰기도 하는데 이길 승(勝)을 돼지 용종(茸腫), 혹이나 사마귀에 비견해 더 하찮게 보는 것이다. 무적(無敵)은 이겨서 되는 게 아니다. 이길수록 적은 더 생긴다. 눈에 보이는 적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적이 많아질 때 위험은 더욱 커진다. 싸우면 무찔러 이겨야 하지만 그것은 지는 것의 시작일 뿐이다. 싸워 이길수록 내 기력도 쇠하고 언젠가 적 같지도 않았던 적에게 지고 만다. 그래 진정한 승자는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자다. 적을 피해 적이 스스로 망하도록 하는 자다. 그게 이길 승(勝)의 도리다. 그 배를 여럿이 저어가는 게 동(同)이다. 구령에 맞춰 배를 저어가는 모습이다. 구령에 여러 손이 노를 저어간다. 그리고 언제든 그 배마저 떠날 수 있을 때
갖는다는 건 행복 불행 성공 실패 이 모든 것의 시작이다. 가졌기에 행복하고 가졌기에, 아니 더 가져야 하기에 불행한 것이다. 가졌기에 써야하고 가졌기에 지켜야하며, 지켜야 하기에 마음이 쓰이고 마음을 쓰기에 항상 마음이 무거운 것이다. 마치 행운(幸運)의 행(幸)이 나를 속박하는 수갑에서 유래해 행복한 순간 불행이 시작됨을 경고하듯 부담의 부(負)도 갖는다는 것에서 시작하는 밝고 어두운 양면의 두 가지 뜻을 가지고 있다. 복잡한 탓인지 한자 부(負)는 금문에서 나온다. 금문은 춘추시대 청동기 시대의 문자다. 사람이 조개를 줍는 모습이다. 조개는 일찌감치 석기시대 인류가 발견한 금과 같은 자산, 기축통화였다. 그리고 뜻은 ‘생활력이 생기다’, ‘의존하다’는 뜻에서 ‘힘입다’, ‘떠맞다’는 뜻을 넘어 심지어 ‘저버리다’, ‘패하다’는 뜻까지 갖게 됐다. 사실 부는 자형만 보면 단순히 ‘갖는다’, ‘갖으려 한다’는 뜻이다. 위의 모든 뜻은 바로 ‘갖는다’는 데서 시작하는 것이다. 가졌기에 책임(責任)이 생기고 부담(負擔)이 생긴다. 그래서 짐도 되고, 근심도 된다. 하지만 그래서 갖지 않을 것인가? 그래서 시작조차 하지 않을 것인가? 두려워 말라. 그칠 줄 알면
迷路 mílù 길을 잃다 老师,对不起,我迷路了! Lǎoshī , duìbùqǐ ,wǒ mílù le !... 선생님, 죄송해요, 저 길을 잃었어요! 迷路? Mílù? 길을 잃어요? 刚才你说的我没有听懂,I am lost ! Gāngcái nǐ shuō de wǒ méiyǒu tīngdǒng,I am lost ! 방금 말씀하신 것을 제가 못알아 들었어요, I am lost ! 哈哈哈,凯文,你是在旅游吗? hā hā hā ,Kǎiwén ,nǐ shì zài lǚyóu ma? 하하하, 케빈, 여행하고 있는 거에요? *영미권에서는 상대방의 말을 잘 이해못했을 때 ‘I am lost. (나는 길을 잃었어)’라고 표현하곤 한다. 중국에서는 ‘没跟上(méigēnshàng,'따라가지 못 했다’라고 표현하며, 보통 ‘不好意思(실례하지만, 죄송하지만)’이라고 운을 띄운다. >>맞는 문구: 老师,不好意思,我没跟上! Lǎoshī , bù hǎo yì sī ,wǒ méi gēn shàng!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
무엇이든 극에 이르면 인간인 우리는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극에 이른다는 것 그 자체가 우리의 인지 능력 밖에 있다는 의미인 탓이다. 지극한 기쁨도 지극한 행복도 지극한 고통도 지극한 슬픔도 실은 우리의 인지 영역 밖에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마치 하나의 성체에서 발현된 수많은 객체들처럼 수억의 섬모처럼 서로가 서로에 반근착절(盤根錯節), 얽매여 있는지 모른다. 극도의 난마(亂麻)에 순간 우리는 놀라 소리치고 울고 싶어도 소리도 눈물도 잃고 만다. 바로 노자의 ‘치극허’(致極虛)의 경지다. 극한의 기쁨에 극한의 고통에 극한의 슬픔에 맞아 우리는 우리 자체를 잊는다. 노자는 이 경지를 ‘歿身不殆’(몰신불태: 몸을 잃어도 위험하지 않다)고 했다. 정말 그럴지, 치극허에 가보지 않은 탓에 잃어 본 적이 없는 탓에 무엇이 어떻게 위험하지 않은지 알 길은 없다. 사실 인생을 살며 극한 고통과 슬픔을 겪는 이 누구며, 극한 기쁨을 겪는 이 누군가? 과연 우리의 몇이나, 삶에서 감정의 극한에 이를까. 그저 감정들의 극한에 대한 숙념 속에 그저 그런가보다 할 뿐이다. 한자의 세계에서 기쁨의 경지는 고통과 닿았다. 지극(至極)의 끝은 또 다른 지극의 시작인 것이다.
"人即专一(인지전일),勇者不得独进(용자부득독진),怯者不得独退(검자부득독퇴), 众之法也(중지법야)." "모두 하나처럼 움직여야 한다. 용감하다고 먼저 나서지 않으며, 겁이 많다고 먼저 물러서지 않는다. 바로 무리를 움직이는 법칙이다." 손자병법 군정편에 나오는 말이다. 군대를 움직여 싸울 때 군대를 움직이는 법이다. 무릇 무리를 움직여 하는 모든 일이 다 비슷하다. 회사 일도 마찬가지다. 똑똑하다고 공을 탐내 혼자 나서 일을 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반면 일하지 않고 일하는 무리에 편승하도록 그냥 둬서도 안 된다. 둘은 모두 조직에 해가 된다. 전자는 조직의 신뢰를 깨고, 후자는 조직의 활력을 저해한다. 조직은 언제나 하나처럼 움직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조직을 만드는 것을 손자는 규율로 봤다. 규율을 지키는 조직은 열도 하나처럼 움직이고, 백도 하나처럼 움직인다. 그렇게 될 때 조직은 목표를 세울 수 있고, 그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으며, 끝내는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목표를 세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조직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것은 규율이 없으면 불가능하며,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조직이 목표를 달성해내는 것도 불가
‘一切唯心造’ ‘일체유심조’(모든 게 마음에 달렸다.) 동양 철학의 정수다. 모든 게 마음에 달렸다. 어떻게 무엇을 마음먹느냐, 바로 그거다. 마음이 무엇이냐, 물리적으로 피가 뛰는 심장이다. 보통 사람의 주먹 크기다. 왼쪽 젖꼭지와 가슴 중앙선 사이의 뼈 아래 근육이다. 사람이 태어나 죽는 그 순간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피를 돌린다. 성인기준 8만㎞ 길이의 혈관에 피가 돌도록 한다. 굴심방결절의 심박조율기 세포는 심장이 일정한 리듬을 가지고 뛰도록 한다. 대략 1분에 72회 정도다. 운동은 심박 속도를 늘리고 휴식은 심박 속도를 줄인다. 감정은 이 심장 리듬의 변화다. 묘하게도 놀랍게도 고대 동양의 현인들은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았다. 일체유심조 이 말 속에는 바로 이 같은 생물학적 깨달음이 담겨져 있다. 대표적인 글자가 쾌락(快樂)의 쾌(快)다. ‘몹시 즐겁다’는 뜻이 쾌다. 역설적이게도 마음을 도려내는 아픔도 담겨져 있다. 쾌는 갑골자가 아닌 금문에 나온다. 소전의 쾌(快)는 심장을 날카로운 기구로 긁어내는 모양이다. 가려움을 긁어주는 모양이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심장을 긁는 극한의 고통이기도 하다. 쾌락의 본질이요, 고통의 본질이기도 하다. 본래
다다른다. 이른다. 사실 성공과 가장 어울리는 동사다. 목표에 이르고 목적에 다다르면 우린 그걸 성공이라고 한다. 이루는 것을 이른다하고 이루고 난 것을 성공이라 한다. 성(成)은 다 이르고 난 뒤를 말한다. 달려오는 동안 들고 있던 무기를 내려놓고 경계 자세에 들어간 것이 성(成)이다. 성(成)까지의 과정이 이르름이다. 지(至)다. 사실 성(成)보다 중요한 게 바로 다다를 지(至)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이를 수 있고 다다를 수 있을까. 한자 지(至)에는 그 답이 있다. 지 자형에는 여러 설명이 있다. 바닥의 자형이 땅을 의미한다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위의 모양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혹자는 태양의 광선이라 하고 혹자는 새라고도 한다. 혹자는 화살이라고도 한다. 가장 의미가 와닿는 게 화살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쏘아 올린 화살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모습이 바로 ‘이른다’는 것이다. 이른다는 것은 내 화살이 이르는 것이요, 화살에 실린 내 힘이 이르는 것이다. 내 능력이 다다르는 곳이다. 그 화살이 떨어진 곳이 바로 내 힘이 닿는 곳인 것이다. 이른다는 것을 알면 내 힘이 닿는 곳을 알면, 목적을 세울 수 있고 그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게
白日依山尽, 黄河入海流 bái rì yī shān jìn, huáng hé rù hǎi liú 欲穷千里目, 更上一层楼 yù qióng qiān lǐ mù, gèng shàng yī céng lóu 해는 서산으로 지고, 강은 바다로 흐르지. 천 리를 더 보고픈가, 그럼 한 층 더 오르라. 참으로 결연하다. 또박 또박 단순한 천리(天理)를 이야기한다. 이 땅이 생긴 이래 한 번도 바뀌지 않은 진리다. '하늘의 해는 동에서 떠 서쪽으로 지고, 강은 …' 도대체 무슨 이야기 하려고 이러나 싶을 때 던진 마지막 말이 압권이다. "더 보고 싶어? 더 듣고 싶어?" 그럼 말해주지. “한 층 더 올라가면 돼.” 참, 할 말이 없다. 중국 당나라 중기 너무도 유명한 왕지환(王之涣, 688~742)의 시 '등관작루'(登鹳雀楼)다. 왕지환은 왕창령, 고적 등과 어울린 변색파 시인이다. 그는 단 여섯 수의 시를 남겼는데, 그중 이 등관작루는 다른 이의 시 수백 수보다 낫다. 남아의 호방함이 넘치고 기백이 있어 많이 인용된다. 중국인은 물론 중국어를 배운 이라면 누구나 한 번 접하게 되는 시다. 관작루는 산시성 영제시에 실제 있는 누각이다. 시어와 문장이 너무 단순해 누구라도 이해
穷质量 qióng zhìliàng 품질이 낮다 真倒霉!我昨天刚买的笔,今天坏了!... Zhēn dǎoméi!Wǒ zuótiān gāng mǎi de bǐ,jīntiān huàile! 정말 운이 없어요! 어제 산 펜이 오늘 망가졌어요! 你是在路边的商店买的吗? Nǐ shìzài lùbiān de shāngdiàn mǎide ma? 노점에서 산 거에요? 是啊! Shì a! 맞아요! 以后不要去那儿买东西了,那的东西质量很穷! Yǐhòu búyào qù nàér mǎi dōngxī le,nà de dōngxī zhìliàng hěn qióng! 다음부터는 거기에서 사지 말아요, 거기 물건의 품질이 아주 가난해요! *영어의 ‘poor’은 ‘나쁘다’라는 뜻도 있고 ‘빈곤하다’이라는 뜻도 있기 때문에 벌어진 실수이다. ‘품질이 나쁘다’의 중국어 표현은 ‘品质差’이다. ‘差(chà)’는 ‘나쁘다, 표준에 못 미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맞는 문구: 后不要去那儿买东西了,那的东西质量很差! hòu bùyào qù nàér mǎi dōngxī le,nà de dōngxī zhìliàng hěn chà! 作者:刘志刚 画家:宋海东
신체 어느 한 곳이 중요하지 않으랴. 예부터 ‘身體髮膚受之父母’(신체발부수지부모: 몸과 머리 피부 모두는 부모가 주신 것이다)라 했다. 몸의 어느 하나도 내 것이 아닌 부모님의 것이니, 아끼고 아끼라는 의미다. 요즘엔 이 말을 듣고 내께 아니니까, 마음대로 하지 하는 젊은이도 있을 수 있겠다. 옛날엔 내 것은 함부로 막대해도 남의 것, 특히 부모, 친지, 친구 등 친족과 지인의 것은 함부로 하지 못하고 더욱 아껴 나온 말이다. 머리도 귀중하고 손도 귀중하고 가슴도 귀중하다. 그럼 그 중에서 우리가 꼭 중요하다 알아야 할 건 무엇일까. 머리? 손? 가슴? 옛 현인들이 꼽은 의외로 발(足)이다. 한자에서 발은 다양한 기호로 쓰인다. 지(止), 족(足), 치(夂) 등이 대표적이다. 머리도, 손도, 가슴도 아닌 발이라니? 현인들은 왜 발을 아는 걸 중시했을까? 발은 기본적으로 이동의 뜻이 있다. ‘걸어간다.’는 게 발의 기능이다. 누구나 알아 잊지 않는 부분이다. 반면 누구나 알아서 쉽게 잊는 부분도 있다. 마치 공기가 흔해서 그 소중함을 모르듯, 너무 중요한 데 너무 당연해서 잊는 부분이다. 발의 ‘멈춘다’는 기능이다. 발은 걸어만 가는 게 아니다. 걸어가 목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