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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국건국공신

中 항미원조전쟁 70주년 기획 ⑮ 2차전역 영원전투에서 한국군 2군단 존재 소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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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미원조전쟁 제 15회 , 운명의  영원전투가 시작되다.

 

1950년 11월 23일 새벽, 인민지원군 제 42군 군장 우루이린(吳瑞林)은,  인민지원군 부사령관 한센추(韓先楚)의 전화를 받는다.

 

38군 군장 량싱추( 梁兴初 )가  38군 단독으로 덕천을 공격하겠다고 하니, 당초에 세웠던 38군 42군의 합동 작전을 변경해, 42군은 단독으로 덕천의 서쪽 영원을 치라는 지시였다. 

 

우루이인은 즉시 새로운 작전계획을 수립했다.

 

 

목표는 42군 정면에 있던 한국군 8사단이었다.

 

정면공격은 예하 125사단이 맡아 밀어부치고, 동시에 126사단은 한국군 8사단의 퇴로를 차단하고, 124사단은 북쪽으로 진격해 영원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사단장들에게 새 작전을 하달한 후, 우루이린은 부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불편한 다리를 절뚝거리며 영원 북쪽의 한 산봉우리에 올랐다.

 

힘들게 정상에 오른 그는 망원경으로 자신의 부대가 공격할 영원 시내를 세밀히 관찰했다.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된 마을에는 하얀 눈만 쌓여 있었다.

 

영원의 한국군 부대상황를 완전히 파악한 그는, 돌격대를 편성해 8사단의 주력인 제10연대 지휘소를 먼저 없애버리기로 결심했다.

 

11월 25일 저녁 무렵, 제 2차 전역의 첫 전투를 위한 공격이 개시됐다.

 

하지만 124사단과 126사단의 진격로가 산속의 작은 길로 매우 비좁은 탓에, 밤새 행군을 했지만속도가 느렸다.

 

설상가상으로 다음 날 새벽에는, 미군 정찰기에게 부대이동이 발각되면서 대대적인 폭격을 맞았다. 희생이 컸지만 가까스로 길을 뚫었다.

 

상대적으로 정면공격을 맡은 125사단의 진격로는 비교적 순탄해, 밤이 밝기 전에 이미 영원 서부지역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한국군 8사단의 지휘소격인 10연대를 기습하기 위한 돌격대는 인민지원군 42군의 125사단 375연대 1대대 3중대였다.

 

3중대는 한국군 보초병들의 저지선을 돌파하고 영원 시내로 진입했다.

 

영원 시내의 한 2층 짜리 건물에서 미 제3사단 소속 17명의 미군을 생포한다.

 

그 중에 여군도 있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 2층 건물은, 미군들이 춤을 추고 즐기는 무도장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공교롭게도 진격일이 일요일이어서, 미군들이 이 곳에서 춤을 추며 휴일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인민지원군의 돌격대였던 3중대 병사들은 그제서야,  이날이 전 세계 대부분 사람들이 쉬는 일요일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어 3중대 돌격대는, 곧 한국군 8사단의 10연대 지휘소를 포위했다.

 

그러나 10연대 지휘관들은 이렇게 빨리 지원군이 나타날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고 전해진다.

 

 

순식간에 연대장과 장교 30여명이 포로가 됐다.

 

당시 10연대 지휘소는 영원 방위를 총 책임지고 있었지만, 연대의 지휘소가 갑자기 사라지면서 지휘계통도 상실됐다.

 

결과는 뻔한 것이었다.  8사단 전체가 지휘 계통이 없어지면서 급격히 와해되기 시작했다.

 

날이 밝자,  그 전날 영원 방위를 돕기위한 지원사격을 하기로 했던 미군 전투기들이 나타났으나, 영원이 이미 함락된 것을 알고,  곧바로 한국군이 남긴 장비와 보급품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38군의 덕천 전투 , 42군의 영원 전투의 승리로, 한국군 7사단과 8사단이 괴멸됐다.

 

3명의 연대장이 생포됐고, 1명의 연대장은 전사했다.

 

전체 병력의 60%가 사망, 실종, 포로가 되었다.

 

한국군 제2군단은 예하 사단을 모두 잃게 된 것이었다.

 

이로써 유재흥 장군이 지휘하던 제2군단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군단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