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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국건국공신

中 항미원조전쟁 70주년기획 ⑥ 북진 한국군의 압록강 첫 도착한 초산부대의 비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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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항미원조전쟁 70주년기획

 

제 6편. 북진 한국군의 압록강 첫 도착부대인 제 6사단 7연대 초산부대의 비극.

 

인민지원군 353연대의 야습, 붕괴된 비운의 ’초산부대’

 

미군등 유엔군의 참전이후 인천상륙작전등의 반격이후, 맹렬하게 북진을 시작한 한국군 가운데 특히 6사단은 북진 선봉의 상징이었다.

 

그 한국군 6사단가운데 7연대는 또 6사단 병력가운데서 정예부대로 북쪽으로 빠른 속도로 진격해 10월 26일 국경도시인 초산(楚山)을 점령했다.

 

그리고 이 병력중 7연대 제 1대대는 쉬지않고 북쪽으로 2시간을 계속 달려 오후 2시 15분경, 마침내 압록강변에 발을 내딛었다.

 

장병들은 감격에 겨워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았다.

 

압록강 물은 수통에 담겨져 서울 경무대에 있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보내졌다. 그래서 이 부대는 ’초산부대’로 불렸다.

 

 

하지만 짧은 기쁨이었다.

 

26일 압록강까지 진출한 기쁨도 잠시, 한국군 6사단 7연대는 사단본부로부터 급보를 받았다. 즉시 철수하라는 김종오 6사단장의 명령이었다.

 

온정리 쪽에서 6사단 2연대가 중공군 매복으로 타격을 입고있다는 보고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앞서 항미원조전쟁 4회에서 기술한 대로,  앞서 북진해 압록강변에 도착한 7연대의 뒤를 따라 초산 남쪽의 운산군쪽으로 진군하던 같은 사단의 제 2연대는 , 7연대가 압록강변에 도착하기 하루 전날인 10월 25일에 매복해 있던 중국 인민지원군의 습격을 받고 크게 패배했다.

 

바로 이 날 한국군이 패배한 10월 25일은, 아이러니하게도 중국 인민지원군의 항미원조전쟁 기념일이 되었다. 

 

북진선봉에 섰었던 한국군 제6사단 7연대에는 미군의 해리 플레밍 소령이 고문으로 배치돼 있었다.

 

김종오 6사단장으로부터 2연대를 지원하기위해 남쪽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7연대 플레밍 고문은 "휘발유, 탄약, 식량이 거의 다 떨어졌으니 이를 보충하지 못하면 철수는 불가능하다"면서 보급물자의 공중투하를 요청하는 답신을 보냈다.

 

10월 26일 보급물자의 공중투하를 요청한 6사단 7연대는 보급이 올 때까지 이틀동안을 압록강 변 초산에서 대기했다.

 

 

한편 10월 25일 한국군 6사단 2연대를 격파했던 중국 인민지원군의 선봉인 제 40군 118사단은 다음날, 압록강변 초산까지 북진해 보급물자의 공중투하를 기다리고 있던 7연대를 포위하기 위해 죽을 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한국국  6사단 7연대가 공중보급을 기다리고 있던 이틀 동안, 인민지원군 118사단 353연대는 험준한 산길을 강행군해 10월 28일 용곡동(龍谷洞) 남쪽 지역에 도달해, 한국군 6사단 7연대가 남하해 철수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중국인민해방군 전사의 기록에 의하면, 일찌기 북한에 들어와 전투준비를 하고 있던 인민지원군 118 사단은, 며칠전에 초산으로 진격하는 한국군 6사단 7연대를 그대로 북진하게 내버려 뒀던 것으로 알려졌다

 

즉 7연대를 북진하게 놔두고, 대신 뒤따라 북진하던 2연대 병력을 먼저 타격하면서 허리를 끊는 포위망을 구축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군 6사단 7연대은 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북진을 계속했다는 것이다.

 

7연대는 보급을 요청한 이틀후인 10월 28일 정오 경에, 마침내 보급물자를 공중 투하받았다.

 

다음날인 10월 29일 오전, 이틀의 휴식후에 차량에 휘발유를 가득 채운 7연대는,  2연대를 지원하기 위해 용곡동(龍谷洞)을 목표로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중국인민 지원군 353연대의 연대장 황더마오(黃德懋)는, 용곡동의 유리한 고지대에 미리 참호를 구축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10월 29일 오전 9시, 한국군 7연대의 선두인 2대대 병력이 용곡동에 진입하자 고지대로부터 맹렬한 공격이 개시됐다.

 

2대대는 순식간에 붕괴됐다. 

 

7연대의 철수 목표지는 다시 회목동(檜木洞)으로 변경됐다.

 

다시 급박한 철수행군이 밤까지 이어졌다. 

 

그런데 이날 밤, 나팔과 피리를 불고 징을 치면서 인민지원군 353연대가 다음날 아침까지 추격하며공격을 해 왔다.

 

이 날이 7연대의 마지막 날이었다고 한다.

 

인민해방군측의 전사자료에 따르면, 이날 포로가 된 한국군은 700여명이라고 한다.

 

이후 한국군 6사단 7연대 병력은 11월 6일까지 사투를 벌이며  사선을 넘어 개천(价川)에 집결했다.

 

 

압록강변 초산에서 후방지원을 위해 출발했을 때 7연대 병력은 3552명이었다고 한다.

 

그 가운데 개천에 재 집결한 병력은 875명 이었다.

 

트럭과 보급품, 그리고 중화기등 중장비는 모두 잃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