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법은 동양의 사회를 지탱해온 규범이다. 예는 사대부를 규율하는 것이고, 법은 백성을 다스리는 것이다. 동양에서는 예부터 예를 중시하는 공자와 법을 중시하는 법가가 다퉜다. 본래 진나라를 장악해 법가가 천하를 통일했지만, 결국 다스리는 것은 공자의 유가 손에 넘겨준다. 예가 법을 이긴 것이다. 권력은 빼앗겼지만, 그 뒤 법가의 가르침은 국가 경영에 중요한 틀이 됐다. 서양의 법체계가 좀 더 근대적 의미에서 정교해 많은 이들이 아시아, 예컨대 한국에 법이 없었다고 이들이 종종 있다. 그러나 큰 오해다. 한국, 중국 아시아 각국에는 나름대로 정교한 법규가 있어 사회를 구속해 왔다. 물론 그것을 만들고 집행하는 데 서구 사회처럼 민의가 제대로 반영되지 못한 면도 있다. 하지만 각 시대마다 법을 만들면서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민의를 반영하려 노력했고, 법의 집행이 공평하게 하려 노력했다.특히 예라는 게 있어 아시아 왕조와 왕조를 넘어 법 해석과 집행에 최대 권한이 있는 황제를 구속했다. 예와 법은 서양에서 그러했듯 동양에서 시대를 지나면서 다양하고 복잡해진다. 예를 읽다 보면 과연 이런 복잡한 절차가 왜 필요한가를 알기 힘들다. 예가 몸에 익으면 절로 몸과 마음
시간의 시(時)는 갑골문의 "해가 태어난다"라는 의미에서 사람의 손이 더해졌다. 햇볕을 받아 나무가 자란다는 것에 사람의 손, 즉 사람의 역할이 더해진 것이다. 해로 대표되는 하늘의 시간, 자라는 나무로 대표되는 땅의 시간에 사람의 손으로 대표되는 사람의 시간이 더해진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시간을 들여 나무를 더욱 우거지게, 곡식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땅의 시간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의미다. 공간의 하늘에서 시간의 하늘을 알고 나면 참 많은 것이 새로워진다. 영원한 하늘의 시간과 한계가 정해진 땅의 시간 차이 속에 새삼 스스로 한계가 더욱 명백해진다. 스스로 자연의 변화를 관조하게 되고, 홀로 있어도 겸허하게 된다. 세상은 멈춰진 듯, 빈 듯 보이지만 영원한 무엇인가로 가득 차 있고, 끊임없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이제 알고 느끼게 됐기 때문이다. 하늘의 시간, 땅의 시간 그리고 인간적 시간을 합친 게 '時'다. 바로 우리가 잊었던 시간의 하늘을 알고 나서 느끼는 변화다. 우리가 하늘 천(天) 자만큼 잘 모르고 사용하는 단어가 '공부'(工夫)다. 역시 시간에 대한 이야기다. 네이버 국어사전은 공부는 명사로 "학문이나 기술
한자는 사람의 글자다. 수천 년 사람의 지혜를 담은 수백 기가의 저장 장치다. 살아있는 한자는 참 매력적이다. 예를 들어 한자는 듣는 것도 볼 수 있고, 보는 것도 들을 수 있다. 한자 속에서 사람의 의식은 무한하게 감응할 수 있고, 움직일 수 있다. 예컨대 향기 신(馨) 자는 들을 청을 글에 포함하고 있다. 글자의 뜻을 분해해보면서 향기를 듣는다는 의미가 된다. 의련(漪漣)은 잔잔한 물결의 파문이라는 뜻인데, 그 발음이 아름다운 게 파문을 보는 게 아니라 마치 물결 파문이 이는 소리를 듣는 듯하다. 그래서 한시는 보는 것을 듣는 듯 표현했고, 냄새를 보는 듯 표현했다. 모두 한자의 관념성 때문에 나온 현상이다. 그런 매력을 가진 대표적인 한자가 하늘 천이다. 먼저 어떻게 움직이는 시공의 하늘을 이렇게 하나의 문자로 잘 표현했는지 경이로울 지경이다. 그것은 단 한 명의 천재가 만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 천년 수천만 명의 학자들이 힘을 보태 만든 게 한자다. 한자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한자는 천재가 만들었어도 인간들이 선택해 쓰지 않으면 보존이 안됐다. 역사 속에 얼마나 많은 천재들이 한자를 만들었고, 사라졌을까? 중국이 낳은 최고의 여걸 측천무후(
옛날 구두쇠 양반이 있었다. 지방에서 높은 직책에 있어 손님을 자주 불러야 했지만, 이 양반은 단 한 번도 제대로 손님을 대접한 적이 없었다. 한 접시에 이것저것 담아 겨우 맛만 보게 하는 정도였다. 어느날 하루 연회를 열었는데, 이날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한 접시에 담긴 음식은 한두 젓가락이면 다 먹을 양이었다. 모두 자리에 앉자마자 음식을 비우고 물만 마셔야 했다. 그때 한 손님이 주인을 불렀다. "이보시오, 어르신. 여기 등 좀 빌려주시죠." 등은 한자다. 중국어로는 灯 dēng이라 발음한다. 흔히 양사 盏 zhǎn과 같이 쓴다. 말을 들은 주인이 놀라 물었다. "아니 백주 대낮에 무슨 등이 필요하단 말이요?" 손님이 답했다. 이게 음식이 어디에 갔는지, 아무리 찾아도 없으니, 좀 더 잘 찾기 위해 등이 필요합니다. 주인은 어이없어 했고, 손님들은 모두 난처해하는 주인을 보고 고소해 했다고 한다.
전쟁의 경우의 수를 아는 것을 '지피지기'(知彼知己)라고 하고, 지지 않는 법을 고안하는 게 '백전불태'(白戰不殆)다. 가장 경제적 승리는 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손자가 "지피지기"(知彼知己; 적을 알고 나를 알면)면 "백전불태"(白戰不殆; 백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라 하지 '백전백승'이라 말하지 않은 이유가 있다. 백 번 싸워 다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백 번 싸워 다 지지 않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기는 것보다 지지 않는 게 더 쉽다. 또 지지 않고 버티면 반드시 승리한다. 손자는 그 것을 위해 승리가 아니라 내가 들고 있는 카드가 패일 경우만 대책을 강구한다. 그것도 우리 카드가 패이면서 적의 카드가 승일 경우, 전쟁은 반드시 패하는 데 이때 대책이 있으면 되는 것이다. 손자의 답은 바로 역(易)이다. 시간이다. 손자는 무조건 지키며 시간을 끌어야 한다고 답을 내놓는다. 보통 우리 카드가 패인 경우 공격을 받는 쪽이 우리다. 패의 카드를 들고 승의 카드를 든 적을 공격하는 바보는 없다. 손자는 이때 지킬 수만 있다면 하늘의 시간은 반드시 방어하는 쪽의 편이라고 지적한다. 만리타향 원정 길이 먹을 음식을 바리바리 싸 들고 노래 부르며
진정한 시간은 나무의 나이테 속에 있다. 수 만년, 수 천 년의 세월을 견딘 바위 속에 있다. 그 시간이 주역의 역(易)의 본질이다. 역은 변화다. 문제를 보는 각기 다른 각도인 것이다. 주역이 만사의 최고인 이유는 변화의 순서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 변화의 순서를 고려하면 문제 해결 가능성, 다양한 답이 나온다. 현실엔 어떻게 적용이 될까? 시간의 변화를 고려해 답을 찾는 방법을 적은 대표적인 책이 손자병법이다. 손자병법은 한마디로 승패(勝敗)의 가능성을 다양화하고 가장 어려운 문제, 지금 답이 없는 문제의 답을 시간을 통해 찾아내고 있다. 먼저 한자의 논리적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승의 반대는 패다. 하지만 한자를 아는 사람에게 승의 반대는 불승이다. 이기지 못하는 것이지 지는 게 아니다. 손자를 이렇게 승을 승과 불승(不勝)으로 나눴다. 이기는 것과 그 반대로 이기지 못하는 게 있는 것이다. 이기지 못하는 게 패를 포함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지는 것, 패가 아니다. 손자는 패도 패와 불패(不敗)로 나눴다. 지는 것과 그 반대에 지지 않는 것이 있는 것이다. 지지 않는 것 역시 승리를 포함하기는 하지만 반드시 이기는 것만 의미하지는 않
路遥知马力, 日久见人心 lùyáozhīmǎlì, rìjiǔjiànrénxīn 길이 멀면 말의 힘을 알고, 오래 겪어보면 사람의 마음을 안다. 참 애매한 게 사람 마음이다. 알겠다 싶으면 모르겠고, 모르겠다 싶으면 알 것 같다. 안다고 하기에 사람의 마음은 너무 깊다. 이런가 하면 저렇고, 저런가 하면 이렇다. 모른다고 하기에 사람 마음은 또 종이쪽만 같다. 그리 쉽게 유혹에 넘어가더니, 때론 모진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바위 같다. 참 모르겠는 게 사람 마음이다. 대체로 분명한 건 낯선 사람일수록 좋다는 것이다. 초면에 예의를 차리고, 가까워지면 무례해진다. 그래서 사람은 가까울수록 악취를 느낀다 했다. 정말 좋은 사람은 난초처럼 그 은은한 향이 오래오래간다 했다. 정말 친해진다는 게 무엇일까? 옛사람들은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알았을까? 역시 한자 속에 그 답이 있다. 친할 친 親의 갑골자는 없다. 그러나 금문에서 그 자형의 모습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친 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금문에서 보이는 친 자는 칼로 형刑을 당한 사람을 찾아와 보는 모습이다. 왼쪽 부호가 형을 가하는 날카로운 도구를 의미하고 오른쪽 부호가 찾아오 보는 이의 눈을 크게 강조한
시(時)는 햇볕을 받아 만물이 나는 것이다. 우리네 신문에서 가장 쉽게 접하는 말이 "시급을 다툰다.", "절실하다."라는 등의 말이다. 문제가 있으니 당장 답을 찾으라는 말이다. 신기하게도 우리 슈퍼맨 정치인들은 그때 그때 답을 내놓는다. 물론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관련 기사가 신문에 나오면, 빠지지 않는 지적이 "'땜 빵' 처방이었다"라는 말이다. 본래 우리 삶 속에 문제란 당장 보기 싫은 것을 말한다. 그러니 답이 시급한 게 인지상정이다. 개인적으로도 청소년 시절 문제를 만나 답을 찾지 못하고 괴로워할 때 가장 듣기 싫은 말이 있었다. "슬퍼하지 마 시간이 약이야." 혹은 "걱정하지 마, 시간이 지나면 좋아져."라는 위로였다. '참 누군 모르나...', '지금 불이 났는데, 10리 밖에 우물이 무슨 소용이냐?' '遠水不救近火;먼 물은 가까운 불을 끄지 못한다.'라고 반발했다. 그런데 돌이켜 보니 정말 모르는 게 맞았다. 무엇보다 문제를 제대로 볼 줄 몰랐다. 답이 중요한 게 아니다. 답보다 중요한 게 문제다. 문제 속에 답이 있다. 문제를 제대로 보기만 해도 답이 절로 나온다. 흔히 하는 이야기처럼 특히 인생의 문제는 수학처럼 정답이 있는
사람이 할 수 있다는 게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스스로 능력 있는, 완성된 사람이 될 것인가? 어려운 질문이다. 평생의 숙제다. 다행스러운 게 우리의 선조의 선조 역시 이런 고민을 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숙제를 풀 단초도 남겼다. 바로 한자다. 한자에는 사람이 "할 수 있다"라는 것은 둘로 나누고 있다. 능能과 회会다. 능은 사람으로 태어나 할 수 있는 것이다. 회는 배워서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 말을 할 수 있고, 영어 등 외국어를 배워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태어나 때가 되면 걸을 수 있고, 배워서 겨울 스키도 타고, 자전거도 타는 것이다. 혹자는 이 말에 "에~이"할 수도 있겠다. 이런 구분이 뭐가 중요한가? 둘의 차이를 좀 더 근본적으로 알 필요가 있다. 본래 글자의 원형을 살펴보면 무슨 뜻인지 안다. 갑골자에서 능은 '나무를 타는 곰', '큰 입과 큰 손, 큰 발을 가진 곰'을 의미했다. 바로 곰의 남다른 능력을 보여준다. 힘이 세고, 나무를 타며, 큰 손으로 적을 위협하고, 큰 입으로 먹이를 단박에 물어뜯는다. 이 앞에서 다른 동물은 그 능력에 탄복할밖에 다른 게 없다. 꼬리를 감추고 숨어야 한다. 이 능에 힘 력力을 더하면
시간은 모든 것을 증명한다. 시험지에 적힌 문제가 아니라 살면서 부딪치는 모든 문제는 결국 시간이 지나면 어떤 식이든 결과가 나온다. 인생의 답은 시간인 셈이다. 그럼 시간은 어디 있는가? 항상 같은 시간은 하늘에 있고, 항상 같지 않은 시간이 땅에 있다. 그래서 하늘의 같은 시간을 사는 땅의 모든 것은 서로 다른 결과는 내놓는다. 땅에서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늘 天이 시간과 공간의 동시적 개념임을 이해하면 이제 시간에 대해 좀 더 정확히 알아야 한다. 시간은 하늘 天에서 보여주듯 하늘에 상응해 변화하는 땅, 공간의 모습이다. 고대 한자 시(時)의 본의는 이런 시간의 의미를 잘 알려준다. 하루를 의미하는 해 위에 날 생(生)가 있는 모양이다. 해가 생겼다는 의미며, 해로 인해 만물의 생김이 이뤄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시는 시대가 바뀌면서 그 모양을 바꾼다. 후세 사람들의 생각이 시에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말이 생기면서 오해가 생겼다"라는 노자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한자는 후세 사람들의 생각이 더해지면서 의미가 분명해지지만, 그래서 더욱 복잡해져 결국 혼란스러워진다. 그래도 최소한 금문까지 보이는 시의 모습은 하늘의 시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