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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국건국공신

꽃은 지고 씨는 뿌려지고

덩샤오핑의 첫 몰락...1966년 8월 이미 손쓸 틈도 없이 진행돼

1967년 8월 5일 300만 천안문 광장은 온통 붉은 깃발로 뒤덮였다.

300만, 무려 300만 홍위병들이 붉은 깃발을 들고 광장을 가득 채웠다. 런민르바오는 당시를 “붉은 물결로 천안문 광장이 덮였다.”고 전했다.

홍위병들은 모두 “마오쩌둥 만세, 공산주의 만세”를 외치고 있었다.

함성은 지축을 흔들었다. 자금성의 성벽도 홍위병의 외침 외침에 조금이 떨릴 정도였다.

그 순간 중국 공산당 건국공신들이 거주하던 중난하이 별장의 한 구석에서는 공개 비판 대회가 열리고 있다.

홍위병의 무리 앞에는 164㎝의 작은 키의 노인이 묘한 자세로 서 있었다. 곧게 서서 허리를 굽혀 머리를 무릎에 닿도록 한 채 땅으로 두 손은 하늘로 쳐들고 서 있는 것이었다.

바로 덩샤오핑이었다. 그의 주위에 홍위병들이 덩샤오핑의 죄상을 소리쳐 고발하고 있었다.

“덩샤오핑은 우파의 주구다.”

이날 고발된 죄상은 크게 3가지였다. 홍위병들은 먼저 덩샤오핑이 50년대 했던 몇 가지 연설을 문제 삼았다. 당시 연설문은 공산화된 중국이 이제 발전을 생각할 때라는 게 주요 내용이었다.

그 연설들에 대해 홍위병들은 “덩샤오핑은 계급투쟁이 소멸됐다는 잘못된 노선을 걷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욕했다. 이어 문제 삼은 것은 “덩샤오핑은 마오쩌둥에 반대했다”는 것이다. 당사는 이 죄상은 분명한 모함이라고 설명을 한다.

홍위병들은 이런 지적을 하면서 덩샤오핑의 평소 지론을 방증으로 내세웠다. “마오쩌둥은 한번도 자신이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다”, “마오 주석과 시각이 다를 수 있는가? 당연히 다를 수 있다.” 등의 말들이 마오쩌둥을 반대하는 증거로 내세워졌다.

당시 만 63세 노인이었던 덩샤오핑의 얼굴은 이미 피가 쏠려 붉어질 대로 붉어진 상태였다. 그나마 다행은 보청기가 빠지면서 그 많은 욕들을 제대로 들을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당사는 이날의 모습을 전하며, 이날이 덩샤오핑에 대한 마지막 공개 비판이 있었던 날이라고 전했다.

불과 1년만 해도 공산중국 건국공신이었던 덩샤오핑은 그렇게 빠르게 몰락을 했다. 활활 타오른 문화대혁명의 불씨는 그렇게 순식간에 류샤오치를 불사르고 덩샤오핑을 덮쳤다.

1966년 5월 들어 마오는 소위 ‘계급투쟁’의 문화대혁명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공개적으로 덩샤오핑에게 경고를 한다. 1966년 8월 1일 마오의 ‘나의 대자보’를 통해 덩샤오핑은 그 늦게 사태가 엄중함을 깨달았지만 이미 모든 것이 늦은 상태였다.

사태는 순식간에 악화됐다. 린뱌오의 동조 역시 사태 악화에 주원인이었다. 1966년 10월 1일 건국 17주년 기념식에서 린뱌오는 류샤오치, 덩샤오핑 등의 “자본주의 노선과의 투쟁을 반드시 진행해야 한다”고 발언했다.

이어 10월 6일 베이징홍위병 제 3사령부가 주최한 결의 대회에 참석한 장칭은 “나는 그대들의 겁 없는 투쟁을 지지한다”고 공표했다. 홍위병들의 문화대혁명, 무산계급 투쟁은 갈수록 격렬해졌다. 10월 23일 덩샤오핑은 결국 이런 분위기에 쫓겨 자아비판을 하고 만다. 10월 25일 린뱌오는 정식으로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의 이름을 거론하며 “이들은 마오주의를 벗어나 자본주의라는 다른 길을 걸었다”고 지적했다.

덩샤오핑은 이렇게 순식간에 구석으로 몰렸다. 1968년 10월 13일부터 31일까지 진행된 제8기 공산당 12중전회에서 류샤오치와 덩샤오핑을 실각을 하고 만다. 류샤오치는 공직과 당적을 박탈 당했고, 덩샤오핑은 공적을 박탈당했지만 그나마 당적은 보존했다.

덩샤오핑의 첫 번째 몰락이었고, 역사의 미묘한 안배가 시작된 순간이기도 했다.